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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 베를린 필의 '베토벤의 밤'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와 베를린 필의 베를린 공연이 현지 시간으로 토요일 밤 여덟시, 이곳 앨버타 산지(山地) 시간으로는 낮 12시에 열렸다. 오늘은 별 탈없이 디지털 콘서트홀이 잘 연결되었다. 연주 레퍼토리는 베토벤의 미사 (Mass) C장조와 교향곡 5번. 특히 5번에 대한 기대가 컸다.

베토벤을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그가 장엄미사 (Missa Solemnis) 외에 다른 미사곡을 작곡한 줄 몰랐다. 당연히 처음 들어보는 곡. 
Go! classics라는 웹사이트에 상세한 곡 해설이 나와 있어서 뒤늦게 읽어보았다. 하지만 음악을 제대로 감상하기는 역부족. 경건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음악이라는 정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래 그림은 듣는 도중 틈틈이 포착한 연주 장면.

아르농쿠는 '눈동자로도 지휘하는 지휘자'라고 할 만하다. 눈을 부릅뜰 때면 저러다 눈동자가 뽁~! 하고 빠져나오지 않을까 불안할 정도...^^

합창

솔로이스트들의 열창.

박수 시간.


오늘 연주회에서 내가 기대한 것은 물으나마나 교향곡 5번이었다. 어떤 연주를 들려줄까...? 아르농쿠르의 5번은 한 편으로는 새로움이자 놀라움이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예상대로였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차이였다. 한 마디로 감상평을 말한다면 '정격연주적'이라는 것이었다. 담백하고 단정하고 단순하면서도 전체적인 구조와 짜임새가 훌륭한 연주라는 것이었다.

5번 연주 직전에 방송된, 그의 인터뷰. 베토벤에 대한 그의 해석을 엿볼 수 있는 대목.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아르농쿠르는 원전악기 앙상블인 '비엔나 콘첸투스 무지쿠스' (Concentus Musicus Wien)로 수많은 음반을 녹음했고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80-90년대의 원전악기 연주 붐의 한 핵심 축이었다. 하지만 콘첸투스 무지쿠스와 함께 주로 녹음한 음악은 바흐와 헨델, 모차르트 같은 작곡가였지 베토벤은 아니었다. 1991년 그가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내놓을 때 그 파트너는 예의 원전악기 그룹이 아닌 유럽체임버 오케스트라 (텔덱)였다. 그 해 음악계의 최대 화제이자 열광의 대상으로 꼽혔던 그 음반을 통해 아르농쿠르는 단순히 원전악기 스페셜리스트만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음악적 통찰력과 빛나는 해석력을 갖추었음을 표나게 과시했다. 

아르농쿠르의 부릅뜬 눈.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베를린 필의 진용은, 말러 연주 장면이 눈에 익어서 그런지 헤성헤성, 한없이 작아보인다. 마치 실내악단을 보는 듯한 느낌. 오케스트라의 편성 규모에서 워낙 차이가 나는 까닭이다.

먼저 1악장의 도입부. 기대한, '몰아치는' 힘, 압도적인 질주의 에너지는 느껴지지 않았다. 액센트가 별로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 단정한 시작이었다. 내게 1악장 도입부의 비교 상대는,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빈필의 1975년 녹음을 들은 이후로는 언제나 그 음반이었고, 적어도 아직까지는 '언제나' 약간의 실망이었다. '거기에는 못미치는구나...역시 헛된 기대였나?..'


연주하는 '폼'만으로도 보는 이를 감동에 젖게 하는 베를린 필의 남다른 내공!


그래도! 오케스트라가 어딘가. 세상에 견줄 상대조차 거의 없다고 여겨지는 저 베를린 필 아닌가. 선입견 때문인지 몰라도 소리는 평소의 베를린 필 답지 않게 육질감이나 기름기를 뺀 듯, 약간 건조하게, 마치 원전악기 스타일의 연주를 듣는 것 같았지만, 전체적인 앙상블은 더없이 민활하고 정교하면서도 자신감에 넘치는 예의 베를린 필이었다. 차고 넘치는 에너지를 애써 자제하는 듯한 느낌마저 풍겼다. 늘 감탄사를 자아내는 베를린 필의 저 무한 에너지!


가장 놀란 대목은 2악장과 3악장이었다. 역시 클라이버나 카라얀의 스타일에 귀가 익어서 그런지 2악장은 약간 템포를 느리게 잡으면서 전체적인 사운드를 가능한 한 넓게 펴서, 유장한 리듬감을 주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 왔는데, 아르농쿠르는 깜짝 놀랄 정도로 빠르게, 말 고삐를 바짝 틀어쥐고 박차를 가하듯 급히 몰아갔다. 그러다 보니 장강이나 대하가 넘실대며 흘러가는 장려한 리듬감과 낭만성을 기대한 나로서는 다소 실망이었지만, 그렇게 빠르고 짧은 호흡으로 끌어가는 데서 나름 새롭고 약동하는 맛은 느낄 수 있었다. 1991년의 유럽체임버 녹음과 견줘 봐도, 2악장의 가속은 쉽게 감지됐다.

눈에 익은 얼굴들. 모두들 혹은 교수로, 혹은 솔로이스트로, 혹은 실내악단 단원으로도 맹활약하는 거장들이다.


3악장도 놀라웠다. '2악장에서 힌트를 줬으니 3악장도 이럴 줄 알았겠지?'라는 듯이 대단히 빠른 템포를 들려주었다. 다시 1991년의 녹음과 비교해 보면, 그 때보다 지금에 와서 도리어 더 원전악기스러운 맛을 강조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3악장을 4악장의 서주로 삼아, 조금씩 조금씩 불안한 기운을 쌓으면서, 4악장의 대폭발로 나아가는 긴장과 스릴을 맛보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3악장도 4악장의 연장인 것처럼, 처음부터 빠른 템포로 나아갔다. 느리면서도 다소 감상적이고 음울한 맛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다소 뜻밖이라는 느낌이었지만 이번에도, 저렇게 해도 나름대로 매력이 있구나 하는 새로운 발견도 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아르농쿠르는 지휘봉을 쓰지 않는다. 맨손 지휘. 지휘봉을 쓰는 지휘자도 합창에서는 흔히 맨손이다.


4악장은 오늘의 5번 연주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대목이었다. 앞 세 악장 전체를 일관되게 꿰뚫어 온 빠른 템포와 에너제를 4악장에서도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5번이 가진 강렬한 이미지를 잘 살려냈다고 여겨진다. 사실 클라이버의 5번 녹음에서 가장 아쉬운 대목이 4악장이다. 3악장까지 첩첩이 잘 쌓아온 에너지를 충분히 폭발시키고 완전연소시키지 못하고 몇몇 굽이에서 약간씩 늘어진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아마 루바토가 그런 느낌에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여기서는 계속 달려야 하는데, 싶은 데서 한두 번 속도를 늦추거나 늘리면 맥이 풀리는 법이니까. 아르농쿠르는 4악장에서 시종 강력한 에너지와 빠른 속도를 잘 유지하면서 멋진 휘날레를 연출했다. 아래 사진은 연주회에서 잡은 몇몇 장면들.

연주회가 끝나고,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퇴장한 뒤에도 관객들은 계속 박수를 쳤다. 지휘자 혼자 나와서 감사하오, 이제 다들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시오, 하는 시간. 베를린 필의 한 전통처럼 굳어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