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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유럽 문학과 스피드 번역 시스템'에 대한 짧은 생각

'언어' 얘기만 나오면 떠오르는 이미지 바벨탑. 브뤼겔의 그림.


일창님의 '유럽 문학과 스피드 번역 시스템'에 대한 나의 댓글 겸 잡생각:

영어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작품이 꼭 영어 소설을 번역한 것처럼 읽힌다는 조르지오 팔레티의 이야기를 보면서 문득 한국의 복거일 선생을 떠올렸습니다. 한국에서는 가장 유명하고, 아마도 유일하게, 번역투 문장을 구사하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읽기 어색하고 버거운, 나쁜 의미의 '~되어지다' '보여지다' 식의 번역투라는 뜻이 아니라(당장 티스토리 블로그의 공지에도 보면 이런 말도 안되는 겹수동태 문장이 많습니다), 실로 유려하고 정돈되고 탄탄한 번역투라는 뜻입니다. 한국의 모든 문필가들이 복 선생처럼 글을 쓴다면 문제겠지만 당신만 유독 그런 글투를 고집하고, 또 그것이 대단히 완성된 형태로 구현되고 있기 때문에, 저는 한국 문단을 살찌우는 의미로운 기여라고 생각합니다. 

스피드 번역의 역사로 친다면 한국도 만만치 않지요. 대학에 입학해서 갑자기 - 정말로 느닷없이 - 원서를 교재로 쓰는데, 일단 살 때는 뿌듯했지만 막상 교수가 지정한 시험 범위를 다 읽어내려고 하니 막막하고 또 막막해서, 결국 야매로 굴러다니는 불법 번역본을 보게 된 사람이 저만은 아닐 겁니다. 그 경우 번역자는, 아니 번역자들은 대개 대학원 석박사 과정인 경우, 가끔은 모모 대학 교수인 경우도 있습니다. 같은 한글인데, 그리고 그것을 아무런 어려움 없이 다 '읽을' 수 있는데도, 정작 그 뜻을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그때사 절감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개떡 같은 소리여? 그래서 그 부분을 원문으로 보면 전혀 어려운 말도 아니고 뜻이 딱 들어옵니다. 번역본을 보면 이건 완전히 한글로 된 난수표... 그렇다고 영어 읽고 해독하는 속도가 워낙 더디니 야매 번역본을 아예 버릴 수도 없고...네가 바로 닭갈비[鷄肋]로구나!

한국의 스피드 번역은 굳이 그 수준까지 내려가지 않아도, 출판계에 유구한, 아마도 한국 번역 역사만큼이나 긴 전통 아닌 전통일 겁니다. 가까운 예 중 하나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스푸트니크의 연인을 꼽을 수 있겠네요. 그게 무슨 상을 받았던가, 일본에서 큰 화제가 됐던가 해서, 불과 한 달 만엔가 보름 만엔가 뚝딱 번역이 돼 나왔더랬습니다. 물론 오역과 졸역 비판을 받았는데, 책 파는 데는 문제가 없었던 걸로 압니다. 그 뒤에 재번역이 됐기를 바랍니다. 하긴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말도 안되는 번역투에 워낙 단련되고 익숙해진 한국 독자들은, 말이 개떡 같아도 찰떡같이 알아먹고 감동하고 눈물 흘리고 즐거워 하기도 합니다. ^^

세계 문화와 전통, 그리고 각기 다른 나라들의 민족적 특질 같은 것이 점점 더 마모되어 다 어슷비슷해지는 현상은 꼭 번역계나 출판계만의 일이 아닌 듯합니다. 결국 모든 게 연결되어 있고, 서로가 서로를 영향 주고 영향 받으면서 변해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팀 팍스라는 분은 번역이라는 시각에서 들어가 문학 세상의 변화 - 변화가 다 좋은 것일 수만은 없겠지요 - 를 개탄한 것이고, 아마도 더 흔한 시각과 주장은 대중문화 전반에서 자주 운위되는 것 같습니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전세계 먹거리 문화의 패스트푸드화, 더 구체적으로는 맥도날드화일 것이고, 전세계 영화, 드라마 판의 할리우드화, 전세계 온라인 소셜 네트워킹의 페이스북화, 전세계 숙박업소의 힐튼화, 혹은 프랜차이즈화, 세계 모든 온라인 검색의 구글화...뭐 그렇지 않을까요?

10년도 더 전에, 실리콘밸리에 출장 갔다가 좀 무리해서 요세미티 공원까지 당일치기로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워낙 고된 여정이어서 그런가, 워낙 주마간산이어서 그런가, 정작 공원 본 기억은 없고, 그 공원 들어가는 발치에서 먹은 아침식사만 아직까지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그야말로 '로컬'한 분위기의 허름한 식당이었는데, 아침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릅니다. 지금쯤 그 식당은 물론 없어졌거나, A&W, 맥도날드, 던킨도너츠 중 어느 한 프랜차이즈의 이름을 달고 있지 않을까요?

스피드 번역이든 느린 번역이든 - '느린 번역 운동' 같은 거 하면 저도 이름 좀 올릴 수 있을텐데요 하하 - 세계 문학의 영어 문학화든, 혹은 세계 문화의 미국 문화화든, 그런 도도한 흐름을 추동하는 엔진은 결국 자본주의의 논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 실은 '전부'라고 하고 싶습니다 - 의 옛 사례들에서 보듯이, 자본주의의 논리나 시스템과 경쟁해서 이긴 것은, 적어도 인류의 역사에서는 아직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결말이 어떻게 될지, 그래서 자못 궁금하고 걱정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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