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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만에 마에스트로!

어떤 지휘자가 진짜이고 어떤 지휘자가 가짜일까? 아니, 가짜라면 너무하고, 그저 평범한 지휘자일까? 그저 듣는 것 말고는 연주할 줄 아는 악기도 하나 없는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게 늘 궁금하다. 

지휘자들의 지휘가 제대로 먹히는지 확인하기도 어렵다. DVD나 TV의 영상은 대체로 편집의 개입 때문에 실제보다 더 과장되고 더 그럴듯하게 바뀌기 십상이고, 설령 실제 연주회에 가서 봐도 단원들이 저 지휘자를 얼마나 신실하게 따르고 그와 함께 호흡하는지 분명히 알기 어렵다. 

그런 편집이라는 필터와, 현장에서 귀로 받는 압도적 음량감의 요소를 다 고려하고도, 아 저 사람 정말 대단하다. 언필칭 마에스트로에 꼭 걸맞은, 거장 답다, 라고 느끼게 하는 사람은 물론 있다. 카라얀이나 번스타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이, 하이팅크나 아바도 같은 고령층까지 가지 않아도, 팽팽한 현역 중에도 그런 사례는 많아 보인다. 요즘 열심히 구경하는 사이먼 래틀 경이 그렇고,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탑'으로 끌어올린 이반 피셔, 로열콘서트헤보의 마리스 얀손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의 리카르도 샤이...

그리고 여기에 소개하려는 에사-페카 살로넨이다. 1958년 핀란드 헬싱키 태생의 작곡가 겸 지휘자. 53세라는 나이가 전혀 믿기지 않는 동안의 미남자다. 1984년부터 2009년까지 무려 26년 동안 LA필하모닉을 이끌었고, 지금은 영국의 명문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다. 물론 객원 지휘는 일일이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그를 굳이 이 블로그에 끌어들인 이유는 작년에 우연히 본 한 비디오 때문이다. 그 이후에도, 여러 지휘자들의 지휘 장면을 볼 때마다 꼭 그 비디오가 떠올랐고, 그래서 며칠 전에 다시 뒤져보았다. 'One minute, Maestro'라는 제목의 짤막한 비디오로 LA필하모닉에서 살로넨을 위해 만든 웹사이트 '살로넨을 경배하다'(Celebrate Salonen)에 들어 있다. 1분 만에 진정한 마에스트로임을 입증해 보였다는 제목인데, 살로넨의 LA필 데뷔 장면을 담았다. 비디오를 보면 그 뜻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이 사이트의 메뉴중 '미디어'를 골라, 그 중 비디오에서 위 제목의 클립을 찾으면 된다). 


1984년 11월27일, LA에 내리자마자 LA필하모닉이 연습하는 'LA 카운티 뮤직센터'로 온 길이다. LA필의 총감독인 어니스트 플라이쉬만이 살로넨을 소개한다. "살로넨 씨와 내겐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우리 둘다 실제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들어보인다는 점입니다." (웃음)

살로넨을 처음 본 단원들의 표정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쟤 뭐야? 웬 어린애가 왔어? 쟤가 우리를 지휘할 거라고? 뭐 그런 표정들, 황당하다는 표정들이다. 

그런데 살로넨은 전혀 긴장한 표정이 아니다. 얼굴 생김새에 걸맞게 '아동틱한' 줄무니 셔츠 차림으로, 심상하게 단원들에게 묻는다. 루토슬라프스키의 노테이션을 하기로 했죠? 아세요? 루토슬라프스키의 노테이션...한 번 가봅시다. 

그리곤 양팔을 새가 날개를 펴듯 크게 벌린다. 그리곤 갑자기 정리된 소리가 따다당! 하고 울려퍼진다. 살로넨이 손을 들어 연주를 중단시키더니 왼손 비트는 화살표이고, 오른손은 일반적인 곡과 음표를 짚습니다. 약간의 예외도 있구요. ... 그리곤 다시 같은 음악. 상큐! (영어 발음이 아직 투박하다).

왼손으로 신호를 하나둘셋 주다가 다시 연주를 중단 시킨다. 오보, 내 두 번째 비트에서 시작하셨어요. 내 오른 손의 세 번째, 왼손의 두 번째 비트에서 시작해 주세요...



단원들의 당혹해 하는 표정으로부터, 진지하고 정돈된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는 데 채 1분도 안걸렸다. 과연 1분 만에 마에스트로다!

지휘자의 카리스마란 저런 것일까? 아니면 단원들은 살로넨의 단 한 번의 손짓과 표정으로부터, 이 친구 진짜다, 라고 읽은 것일까? 분명한 것은 저 순간이 살로넨과 LA필의 25년여에 걸친 인연의 시작이었다는 점이다. 

영국의 논쟁적 음악평론가 노먼 르브레쉬트에 따르면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지휘자와 리허설을 해보면 불과 몇 분만에 거장과 평범한 지휘자를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과장인지 몰라도 진짜 굉장한 지휘자인 경우에는 그저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에 단원들의 소리가 바뀐다고 할 정도이다. 푸르트뱅글러와 므라빈스키가 그런 경우였다고 단원들이 회고하는 것을 비디오 본 기억이 난다. 소리지르는 해골이라는 해괴한 별명에도 불구하고 단원들로부터 크나큰 존경을 받았던 게오르그 숄티도 그런 경우 - 한 단원은 그와 난생 처음 리허설을 하는데도 불과 몇 분만에 오케스트라의 음색이 달라졌다고 회고했다.

마에스트로, 마에스트로, 참 흔하게 쓰이는 말 중 하나다. 하지만 여전히, 진정한 마에스트로는 많지 않다. 진정한 마에스트로가 들려주는 연주는 심금을 울리지만, 가식과 허영의 헛 마에스트로는 허망하게 잊혀지고 말 연주로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간다. 

살로넨이 파리 오케스트라와 공연한 장면을 아래에 붙인다. 1984년으로부터 3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동안이고 더 멋있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