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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 Histories...케이트 앳킨슨의 감동적인 인간 탐구

책 제목: Case Histories
지은이: 케이트 앳킨슨 (Kate Atkinson) -

공식 홈페이지
출판사: 리틀, 브라운 앤 컴퍼니 (Little, Brown and Company)
출판일: 2007년 10월15일
형식: 킨들 에디션 (Kindle Edition)
화일 크기: 436 KB
종이책 분량: 320 쪽
언어: 영어

케이트 앳킨슨이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것은 '언제나 좋은 소식이 있을까?' (When Will There Be Good News?)에 대한 여러 언론의 극찬을 듣거나 읽으면서다. 하드커버는 부담스럽고 나중에 페이퍼백이 나오면 사보리라, 하다가 결국은 전자책 버전 (킨들)을 사게 됐다. 그 때 함께 산 게 이 Case Histories이고, 출간일이 먼저라 순서대로 읽는다고 집었다. 아니, (화일을) 열었다.

Case Histories를 뭐라고 번역해야 좋을까? 사전에 보면 그 단수형인 Case History를 병력 (病歷)이라고 해놓았는데, 여기에서 Case는 병보다는 경찰이 조사하는 '사건'이 더 온당해 보인다. 어쨌든 제목만 보고, 작가가 아직 본격 장편을 쓰기 전에 경찰의 특이한 사건 기록을 단편 소설처럼 엮었나보다, 라고 생각했다.

맨 첫 장의 제목 '사건 기록 제1번 1970' (Case History No. 1 1970)에 이어, 제2번, 제3번으로 가는 걸 보면서,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각 장의 에피소드가 다 달랐고, 등장 인물이 다 달랐으며, 사건의 양상도 각기 다르면서도 각 장으로 완결되는 모양새였다. 한 가족에게 벌어지는 막내 딸의 실종 사건, 변호사 사무실에서 예기치 못하게 일어난 살인 사건, 또 다른 가족의 끔찍한 도끼 살인 사건 등. 물론 실종된 아이를 찾았는지, 살인범은 잡았는지와 같은 출구는 보여주지 않았지만 각각이 단편을 구성하는 데는 별로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더구나 요즘 미제 사건이 좀 많은가.

그런데 갑자기 4장 제목이 '사건 기록 몇 번'이 아니라 '잭슨'이었다. 잭슨 브로디.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참 매가리 없고, 바람 피운 아내한테 이혼 당하고, 여비서는 비서인지 상전인지 헷갈리는, 갈 데 없는 '루저' (loser) 스타일로 나온다. 그러나 이야기가 죽 풀려나가는 가운데, 그가 실은 대단히 매력적이고 인간적이고 부성애 넘치는 사람임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알고 보니 앞에 나온 세 과거의 기록은 경찰직을 그만두고 사립탐정이 된 잭슨이 해결해야 할 사건들이다. 그러나 이 세 사건 중 어느 하나도 마이클 코널리 식의 연쇄살인범이나 하다 못해 전직 특수부대 출신의 무시무시한 혐의자와 연관이 없다.

아멜리아와 줄리아 두 자매는 실종된 지 30년도 더 넘은 막내 동생 올리비아를 찾아달라고 의뢰하면서도, 잭슨에게 반해 경쟁하듯 추근댄다. 이 소설의 주요 화자 중 한 사람으로, 줄리아와 달리 매력적인 외모도 적극적인 성격도 못되는 아멜리아는 대체로 속으로만 끌탕한다. 그런 그의 미묘하고 복잡하면서 지극히 인간적인 심리가 마치 심리학자의 'case history'처럼 적나라하게 표현되는데, 그것을 읽어가는 재미가 이 소설의 여러 미덕 가운데 하나다.

아버지의 변호사 사무실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첫날, 정체도 모르는 괴한에게 살해된 딸의 범인을 찾아달라는 두 번째 사건 의뢰는 더 가망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누가 범인인가보다는, 그 딸을 잊지 못해 괴로워 하는 아버지 티오 (Theo)의 심신의 방황이 어떻게 귀결될까가 더 궁금하다. 딸의 비극에 모든 것을 놓아버린 아버지의 눈물겨운 부정이 소설 곳곳에서 독자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세번째 도끼 살인 사건은 실상 가족 간의 비극이고 가해자가 현장에서 곧바로 체포됐기 때문에 아무런 수사 거리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현장에는 어린 딸이 있었다. 남편을 도끼로 끔찍하게 살해한 언니의 동생이 나타나 잭슨에게 가출하고 행방이 묘연해진 그 조카를 찾아달라고 의뢰한다.

소설은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이 세 에피소드를 충분한 개연성과 치밀한 시나리오, 세밀하고 정교한 캐릭터 설정으로 촘촘히 엮어 간다. 처음에 우연처럼 보였던 사건들이나 대화, 단서처럼 보이지 않았던 몇몇 소품이나 정황은 뒤에 충격적인 반전을 정당화하는 씨앗이 된다.

나는 케이트 앳킨슨에게 반했다. 이처럼 침착하고 꼼꼼하고 치밀하게 사건을 엮어가고, 그 사건 속의 사람들을 각기 그 개성이 뚜렷이 드러나도록 직조하고, 그 사람들이 속에 가진 생각이나 감정을 절절히 묘사하는 작가를 만나지 못한 것 같다. 속도감 넘치고 피가 분수처럼 뿜어오르는 액션형 범죄소설을 기대한 사람에게는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범죄 사례를 통해 인간의 슬픔과 기쁨, 분노와 절망, 공포와 희망 따위를 들여다보고 공감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앳킨슨은 사람의 몸이 아니라 마음을 차근차근, 세밀하고 정묘하게 해부하는 것 같다. 앳킨슨에 반하기 시작한 것은 2장부터다. 딸을 사랑하는 변호사 아버지의 마음, 그 아버지를 배려하는 딸의 마음, 그러나 그 허약한 행복이 갈갈이 찢어지는 장면을, 거의 시처럼 묘사했다. 딸에 대한 아버지의 심정을 그리는 대목에서는 그만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다.

At the moment he stopped praying, at the moment he knew she was dead, Theo understood it would never cease to happen. Every moment Laura would be standing by the photocopier, negotiating the complexities of the land registry form, wondering when her father would be back or whether she could take a lunch break because she was starving. Maybe regretting taking this job because it was actually quite boring but she'd done it to please her father, because she liked to make him happy, because she loved him. Laura, who slept curled up in a ball, who liked hot buttered toast and all the Indiana Jones movies but not Star Wars, whose first word was "dog," who like the rain but not the wind, who planned to have three children, Laura, who would be forever standing by the photocopier in the office in Parkside waiting for the stranger and his knife, waiting for the world to go white.

앳킨슨의 표현들은 정교하다. 등장인물의 성격에 걸맞은 표현과 말투를 적절히 잘 표현한다.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의 고민, 괴로움, 방황, 갈등, 분노, 고독 같은 어두운 감정들이 실로 꼼꼼하게 사건들과 연계되고 붙어 있다. 그리고 가망 없어 보이던 사건들이 조금씩 조금씩 그 놀라운 반전을 향해 나아가는 가운데, 역시 가망 없어 보였던 주요 인물들의 삶에도 출구가, 희망이, 심지어 구원이 나타난다. 따라서 앳킨슨의 이 소설을 읽어 가는 과정 자체가, 독자에게는 - 적어도 나에게는 - 깜깜한 어둠이거나 이정표 하나 없는 낯선 도심에서 당황하고 절망하다가, 차근차근 길을 짚어 가고, 단서를 읽어가는 가운데, 햇빛 눈부신 출구를 찾게 되는 과정이다. 혹은 꽉 막힌 감정의 골짜기를 헤매다가, 구원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되는 과정이다.

아내가 그 책 어때? 하고 물었을 때,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내가 먼저 자발적으로, 이 책 꼭 읽어봐야 한다면서, '리마커블(remarkable) 한 책'이라고 말했다. 아내는 평소 과장 잘하는 내 성격을 잘 아는지라, 약간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오, 그 정도야?'

소설을 읽다가 킨들의 노트 입력 기능을 이용해 'brilliant'라고 써넣은 대목을 하나 소개하고 독후감은 여기서 끝. 별 다섯에 다섯. 앳킨슨의 책을 다 읽어볼 생각.

A nurse came by to take his temperature. She stuck the thermometer in Theo's mouth and, smiling at Lily-Rose, said, "I think your Dad'll be discharged tomorrow," and Lily-Rose said, "That's good," and Theo said nothing because he still had the thermometer in his mouth.

(이 대목에 대한 상황 설명이 필요하다: 티오는 10년 전에 딸을 잃은 충격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해 일도 작파하고 그 범인을 찾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있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비만인 티오는 호흡 곤란 증세를 완화하려 벤톨린 흡입기를 쓰는데, 이 날은 챙겨나오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게 없는 것을 깨닫는 순간 더욱 패닉 상태에 빠지고 결국 정신을 잃는다. 눈을 떠보니 병원, 그리고 그를 구해준 것은 평소 자주 마주치던 어린 홈리스 소녀 릴리-로즈였다. 티오는 그 소녀를 볼 때마다 속으로 걱정하면서도 괜히 말이라도 걸었다가는 변태 성희롱범으로 몰릴까봐 그저 지나치기만 했었다. 맨 뒤의 이유를 감동해서라고 안하고 그의 입에 온도계가 물려 있어서라고 한 것이, 이야기를 죽 따라오던 내게는 거의 벼락처럼 강렬하게 들어왔다.)

관련 링크: 스코틀랜드의 일간지 스카츠맨에 실린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