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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식 매시업 소설 'Gone' by Michael Grant



소설 제목은 Gone. 사라져버린. 가버린. 뜻하지 않게 읽은 소설. 

내 경우 이 말은 (1) 아마존에서 공짜로 나온 걸 보고 '공짜라면 양잿물이라도 마다 않는다'라는 정신으로 내려받은 것, 혹은 1, 2불 '싼맛'에 산 것; (2) 그 책의 첫 한두 페이지를 훑어보다 낚여 (hooked) 몇 페이지 더, 몇 페이지 더, 하다가 결국 다 봐버린 것; (3) 따라서 책 자체의 재미는 보장할 만한 것이라는 뜻이다. 

표지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이 소설은 '야!'다. YA. Young Adults. 청소년을 독자층으로 겨냥한 젊은 소설. 작가는 마이클 그랜트. 이 책에서 처음 만났는데 문장이 탄탄하고, 무엇보다 긴장감을 적절하게 유지하면서 줄거리를 끌어가는 솜씨가 여간 아니다. 나중에 아마존닷컴의 작가 페이지를 보니 나만 몰랐지 '야' 분야에서는 아주 유명한 작가였다. 이미 펴낸 책만 150권에 이른다고 한다. 15권의 오자가 아니다. 백오십권이다. 평생 15권만 냈다고 해도 분야에 따라서는 결코 과작이라고 할 수 없을 터인데 거기에 10을 곱해야 하는 수만큼 책을 냈으니 이건 다작 정도가 아니라 '인간 출판공장'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표지는 깬다. 유치하고, 메시지도 없어 보인다. 얘들이 어쨌다고? 모델들인가? 둘이 사귀는 사이? 그래도 책의 품질을 표지만 보고 평가하지 말라는 조언을 명심하면서 제꺽 본문으로 들어갔다. (e북에서는, 특히 책의 표지가 아니라 실제 독서의 첫머리, 곧 서문이나 1장을 디폴트로 펼쳐 보여주는 아마존 킨들에서는 표지의 영향력이나 책의 '호화 장정'이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게 좋은 점이기도 하고 나쁜 점이기도 하다. 특히 표지 디자인이 잘된 책인 경우, 킨들로는 그런 책의 내용 외적 요소로부터 느끼는 만족감을 맛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 그게 e북의 대중화를 더디게 하는 한 원인이기도 할 것이다.)

첫 머리는 교실 장면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샘이 자기 자리에 앉아 칠판에 필기하는 선생님을 보고 있는데 어느 순간에 사라져버렸다. 알라딘의 마술램프나 라스 베이거스의 마술쇼에 나오는 장면처럼 펑~하고 연기를 내면서 꺼진 것은 아니지만, 마치 투명인간으로 변하듯 사라져 버렸다. 알고 보니 그 선생님만이 아니다. 학교의 모든 어른, 특히 열다섯 살 이상인 사람은 다 지상에서, 샘이 사는 캘리포니아의 작은 마을 '퍼디도 비치'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이들은 공황 상태에 빠진다.

평소에는 전혀 튀지 않고 평범하게 지내지만 위기 상황만 닥치면 남다른 용기와 리더십을 발휘하는 샘이 자연스럽게 리더로 부각되지만 본인은 그런 각광을 원하지도 않고, 리더가 될 생각도 전혀 없다. 그 사이 다른 양아치들과, 퍼디도 비치의 (문제 많은) 부유층 자제만 다니는 사관학교 비스름한 '코츠 아카데미'(Coats Academy)의 깡패들인 케인과 그 패거리가, 이제는 '방사성 낙진 지역의 청소년 구역' (Fallout Alley Youth Zone, 줄여서 '페이즈' FAYZ라고 부른다)으로 개명된 청소년들만의 세상을 접수하고 지배하기 시작한다.

소설은 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에다 쥘 베른의 15소년 표류기, 스티븐 킹의 언더 더 돔 (Under the dome), 그와 비슷한 심슨스의 돔 에피소드, 슈퍼맨, 환타스틱 훠, 엑스멘 따위를 적당히 버무려 놓은 양상이다. 요즘 물리도록 나오는 이른바 '파라노멀' (paranormal) 소설류의 한 변주라고 보면 되겠다. 거기에 원전의 무서움, 방사능 유출에 따른 묵시록적 영향 같은 메시지가 끼어든다. 전세계가 종말한 것인지, 아니면 퍼디도 비치만 따로 거대한 유리벽 안에 갇혀 격리된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사안의 심각성과 그 배경이 무엇인지도, 1권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하는 한 장치로서는 퍽 효과적이다. 하지만 소설 자체로서는 별 깊이도 없고, 뭔가 훌륭한 인생의 교훈을 찾기도 - 굳이 찾으려고 한 것은 아니고 큰 변수도 아니지만 - 어렵다. 볼 때는 흥미진진한데 보고 나면 별로 사무치는 인상이나 감동이 없는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와 꼭 닮았다. 얕고 덧없다. 각 등장인물의 성격도 다소 비현실적이고 결말도 훤히 내다보인다. 술술 넘어가고, 그래서? 그래서? 하고 독자를 붙들어(거의) 끝까지 잡아끄는 힘은 칭찬할 만하지만, 그 뿐이다. 

책은 익히 예상한 대로 1권에서 끝나지 않고, 허기 (Hunger), 거짓말 (Lies), 전염병 (Plague) 등 1편과 비슷한 스타일의 짧고 강렬한 외자짜리 제목의 후속편으로 이어진다. 1권을 공짜로 뿌린 것도 그 뒤에 계속 읽어가도록 유도하기 위한 '떡밥'이었던 셈인데, 미안하지만 나는 그 떡밥 하나만 먹고 떨어지련다.

'Intense, marvelously plotted. A tour de force.' 책 표지에 적힌 칭찬. 에이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별 다섯에 셋쯤. 그리고 그 셋의 대부분은 작가의 문장력과 이야기꾼으로서의 내공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