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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elo in the Real World (마르셀로의 특별한 세계) - 가슴 아픈, 가슴 아프게 아름다운, 성장소설

참 아름다운 표지. 학교 후원의 일환으로 아내가 이 책을 샀다. 버몬트의 한 시골 마을, 별들로 가득찬 밤하늘...참 아름답다.

책 제목: Marcelo In The Real World [Paperback]
형식: 페이퍼백 (내가 읽은 것은 PDF 화일)
지은이: 프란시스코 X. 스토크 (Francisco X. Stork)
독자층: 청소년 (나도 여기에 끼었으면!)
분량: 320쪽
출판사: Scholastic Paperbacks; Reprint edition 
발행일: 2011년 2월1일
언어: 영어
판형: 7.9 x 5.2 x 0.9 (인치)

이걸 어떻게 번역해야 그 뜻이 제대로 먹힐까? 진짜 세상의 마르셀로? 현실 속의 마르셀로? 마르셀로의 현실 체험? 

아마 한국에서 번역된다면 전혀 다른 제목이 나와야겠지만 직역하면 대략 그렇다. 눈치 빠른 사람은 제목에서부터 이 책의 성격을 넘겨짚어, 마르셀로가 아직 어른이 아닌 청소년이며, 따라서 진짜 세상, 현실 사회에 나와 겪게 되는 일종의 성장소설일 것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겠다. 반은 맞았다. 제목만 봐서는 마르셀로에게 일종의 발달 장애, 혹은 인지 지체 (cognitive delay)가 있음을 알 도리가 없으므로, 완전히 맞추지 못했다고 꼬투리 잡을 일은 없다.

이 책이 좋다는 말을 여기저기서 들었고, 아마존닷컴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 본 리뷰도 칭찬 일색이었다. 봐야지 봐야지 하며 구입을 미뤄만 왔는데 내가 평소 존경하는 고수 - '鼓手' 아닌 '高手'...실없는 농담 ㅎㅎ - 블로거 얼음배님이 이 책의 PDF 화일을 보내주셨다 (원래 이런 거 쓰면 안되지만, 그 뒤에 아내가 종이책을 샀으므로 괜찮을 거라고 믿는다). 

냉큼 읽었다. 읽기 시작하자 금방 빨려들었다. 'Absorbing'이라는 영어 표현이 꼭 맞을 듯했다. 헤어나기가 어려웠다. 마르셀로의 마음자락이, 그의 생각의 논리가, 그의 고민의 주제가, 이루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아름답고 안타깝고 섬세했고 깊고 넓었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 현실의 상황이나 논리와 곳곳에서 격절되거나 분절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보통' 사람들, '정상'인 사람들은 그 마르셀로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고, 하여 그를 뭔가 모자라거나 나사가 한두 개쯤 빠진 지진아로 여긴다. 

이제 열일곱 살인 마르셀로 산도발 (Marcelo Sandoval)의 시각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은 그가 머릿속에서만 듣는 음악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한국말로 흔히 '자폐증'이라고 부르는 오티즘적 증세를 보이는 마르셀로는 사회로부터 격절된 그만의 안온한 세상을 살아간다. 특수학교에서 치료의 일환으로 조랑말을 돌보고, 집에서는 여전히 나무 위에 지은 '트리하우스'에서 잠잔다. 종교에 대해 집착에 가까운 관심을 갖고 성경을 거의 외우다시피 하며, 종교 문제에 대해 궁금증이 있을 때마다 랍비와 토론을 벌인다 (마르셀로가 유태인이 아님에도). 

그런 그에게 시련이 닥친다. 법률사무소를 운영하는 아버지가 마르셀로에게 이제 진짜 사회의 삶을 체험할 때가 됐다며, 여름동안 예년처럼 조랑말과 지내는 대신 자신의 사무소에서 일하도록 시킨 것이다. 마르셀로는 새로운 세상에 던져지는 게 싫지만 거부할 수도 없고,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다. 그는 법률사무소의 우편물실에서, 마르셀로 때문에 더 일을 잘하는 임시직원을 채용할 수 없게 돼 불만인 재스민과 우편물을 정리하고, 문서를 복사하고 배달하는 일을 하게 된다. 

마르셀로는 새 환경에서 그의 직속 상관이자 나중에는 진솔한 친구로 발전하는 재스민을 만나고, 다양한 - 하지만 대체로 유쾌하거나 친절하거나 이해심 깊지는 못한 - 변호사 여비서들을 만나고, 아버지의 법률사무소 파트너의 아들을 만난다. 소설은 이들과 만나고 대화하고 갈등하면서 마르셀로가 겪게 되는 마음의 행로를 지도처럼 펼쳐 보인다. 그의 내밀한 마음결은 독자들로 하여금 종종 감동하게 하고, 가슴 조이게 하고, 안타까워 하게 만든다.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3인칭으로 부르는 마르셀로의 화법은 귀설고 어색하면서도 때로는 애잔하고 때로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재스민을 앞에 두고, "재스민은 자기가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라고 묻거나, "마르셀로는 재스민이 이 일을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라는 식이다.

이 소설이 더욱 빛나는 것은 단지 마르셀로의 경험담을 잔잔하게 풀어가는 데 머무르지 않고, 비단 마르셀로뿐 아니라 독자 누구라도 고민하고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는 난제를 던져 소설의 성격과 색깔을 한층 더 복잡하고 다채롭게 만든다는 점이다. 

마르셀로는 서류를 정리하다 자기 또래의 여자 아이 사진을 발견한다. 한쪽 얼굴밖에 없는 얼굴. 다른 한쪽은 무엇엔가 맞거나 찢겨 만신창이가 돼 버렸다. 그러나 그 여자 아이의 눈빛을 보면서, 마르셀로는 그 아이를 찾아 그렇게 된 사연을 듣고, 그 아이를 도와줘야만 하겠다는 맹렬한 바람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사연을 좇아가는 가운데, 그는 자기 자신뿐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의 운명까지도 바꿔놓게 될지 모르는 심각한 선택의 딜레마에 빠진다. 

'마르셀로...'와 종종 비교되는 마크 해든의 소설. 나는 그럭저럭 흥미롭게 읽었는데, 아내는 끝내 마치지 못했다.

소설은 참 재미있었다. 작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섬세하고 꼼꼼하고 객관적이면서도 따뜻한 시각을 잘 유지한다. 마르셀로의 시각으로 썼으니 객관적이라는 표현에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의 감정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고 사랑이나 미움, 기쁨이나 슬픔의 감정을 제대로 느낄 줄 모르는 것으로 돼 있다는 설정에 이르면 이해가 간다. 그 때문에, 그의 관찰기는 마치 필드에 나선 과학자의 시각처럼 관찰 대상으로부터 적당히 떨어져 있고, 또 정확하다. 그의 3인칭 화법도 그러한 '객관성'의 느낌을 더욱 강화한다. 

이 소설의 리뷰를 보면 자주 '한밤중에 그 개에 일어난 기묘한 사건' (The Curious Incident of the Dog in the Night-time)을 들먹이고 이 두 소설의 공통점이 지적된다. 아마도 그 화자가 둘다 오티즘 - 혹은 그와 비슷한 발달 장애 - 증세를 가진 아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 두 책의 리뷰도 하나같이 찬사 일색이었고 그런 장애를 가진 화자의 생각을 기막히게 표현했다고들 흥분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아이를 둔 아버지로서, 나는 그런 리뷰가 못마땅했다. 내가 볼 때는 둘다, 그저 좀 특이한 사고와 논리 체계를 갖춘 화자를 설정했구나, 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늘, '내 아이가 이 정도의 오티즘, 아스퍼거 증후군, 발달 장애, 뭐라고 부르든, 이 수준만 된다면 대로에 나가 벌거벗고 춤이라고 추겠다'라고 생각했다.

내겐 이들이 크나큰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요컨대 이들 소설에 대한 외부의 리뷰는 그 화자들의 비정상적인 증세에 대해 정말로 공감하거나 연민을 품어서 그렇게 나왔다기보다는, 단지 다른 수많은 소설들에 비해 차별적이고 특이하다는 그 대목 때문에 혹한 것처럼 - 늘은 아니지만 자주 - 그렇게 보였다. 

현실 세계로 나온 마르셀로는 잘 살아갈까? 물론이다. 의문의 여지가 없다. 어쩌면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더 풍요롭고 유의미한 삶을 살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소설이 묘사한 고민과 갈등, 감정의 숙제는, 마르셀로를 한층 더 성숙시키고, 그를 정상적인 보통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아가게 해주는 한 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내 아이도 마르셀로처럼 될 수 있을까? 아니 그 이전에, 현실 세계로 진입할 수나 있을까? 

참 따뜻하고 아름다운 소설을 읽었다는 느낌의 한 켠으로, 내 아이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이 아련히 스며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후기: 이 글을 다 쓰고 나서 알라딘을 검색해 보니 '마르셀로의 특별한 세계'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