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는 얘기

나는 머피의 법칙이 싫다...영하 30도 맹추위 속, 멈춰버린 보일러

일어날 수 있는 나쁜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라는 게 머피의 법칙이다. 버터 바른 빵이 바닥에 떨어질 때는 꼭 버터 발린 쪽이 바닥을 향한다 (중력의 법칙? 버터 바른 쪽이 조금이라도 무거워서?). 우산 들고 나가면 비구름도 물러나고, 벼르고 별러 몇 달 만에 세차 하면 비 뿌린다. 

그래도 이건 정말 바라지 않던 일이다. 에드먼튼 공항 영하 37도, 나 사는 세인트 앨버트 영하 33도 (왜 늘 공항이 제일 추울까? 허허벌판이라서?). 그런데 보일러가 서버렸다. 영어로 보일러는 뜨거운 물 나오게 해주는 그 물통이고, 우리말로 보일러 보일러 하는 것은 영어론 '훠니스'(furnace)다. 네이버 영한 사전으로 찾아보니 용광로, 고로란다. 이게 뭐야. 우리가 지금 용광로로 난방하고 있니? 

바로 이 모델. '인피니티 96'. 이름으로 보아 내구성 좋다는 뜻인데, 서버리면 곤란하쥐!

각설하고, 이 훠니스가 서버렸다. 22도로 맞춰놓은 온도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20도로 내려가 있다. 곧 다시 돌겠지, 불안불안한 마음을 진정하며 집을 나설 무렵에도 20도...그래도 체감온도는 이미 20도 밑이다. 이건 아닌데...대체 뭐가 문제일꼬?

사무실에 도착해 집에 다시 전화하니 18도까지 떨어졌단다. 인터넷으로 뒤져보니 공기 필터를 제때 청소해주지 않으면 서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아내에게 필터를 청소해 보라고 한다. 

(약 30분 뒤) 필터를 깨끗이 청소한 뒤 다시 끼웠는데도 훠니스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한다. 시동이 걸리는 듯 팬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가는 다시 멈춰버린다는 얘기. 집안이 무지 썰렁하다, 라는 불안감이 여실히 느껴지는 아내의 목소리.

이거 안되겠다. 아침 회의 마치자마자 집안에 비상 사태가 생겼다며 조퇴했다. 우리집 훠니스가 멎었어, 했더니 다들 눈이 화등잔만해진다. 

왓? 투데이? 그래, 그게 바로 나도 하고 싶은 얘기다. 이 징글맞은 머피의 법칙! 

또 한 동료는, 훠니스 안돌아가면 지붕 위의 눈도 제대로 안녹아서 지붕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데...라고 말한다. 이거 위로하자는 거야, 겁주자는 거야? 

집에 들어서니 과연 썰렁하다. 바깥보다야 물론 더 따뜻하지만 그 서늘한 느낌에다, 가장 추운 날 가장 요긴한 난방 시스템이 서버리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만났다는 생각에, 심리적 추위는 바깥 날씨 못지 않다. 당시 바깥 기온은 영하 27도...

매뉴얼 들춰 읽어보고, 인터넷 검색해 우리집 모델과 관련된 여러 문제도 훑어본다. 훠니스 덮개를 열어 스위치를 껐다 켰다도 해보고, 아내가 깨끗이 청소했다는 필터도 괜히 꺼냈다 다시 넣어본다. 필터를 하도 오랫동안 청소하지 않아서 거의 막혀버린 것 같았다는 후일담을 아내가 건넨다. 에러 메시지를 표시하는 오렌지색 불이 세번 두번 깜빡거리면서 뭔가 이야기를 전하는데, 인터넷에 들어가봐도, 정작 그 점멸 횟수에 따른 메시지는 보이지 않는다. 

퓨즈(fuse)가 나간 것일까? 그랬다면 아예 공회전도 하지 말아야 하는데, 가끔 병상에 누운 사람이 일어나 보려 애쓰듯 위잉~ 하고 팬을 돌리며 작동을 시작할 기세였다가는 다시 풍선 바람 빠지듯 퓌유유~ 하곤 서버리는 건, 퓨즈엔 문제가 없다는 얘기 아닌가? 너 나한테 묻는거니? -_-;;;

불이 확 붙으면서 '용광로'(?)에서 화염방사기 쏘는 소리가 나야 하는데 그게 보이질 않는다. 아무래도 답이 안나왔다. 

일단 보일러/용광로/훠니스 수리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2시~3시 사이에 테크니션이 갈 거란다. 얼마나 하나요? 방문 한 번 하는 기본 요금 79쩜몇달러 (그러니까 80달러)에 병세 진단세 80달러, 그리고 그거 고치는 비용 추가, 거기에 부품(이 들어갈 경우) 비용 또 얼마... 그러니까 '적어도' 250달러 이상은 나올 거란 얘기... 그래도 얼어죽는 것보다야 낫겠지. 

다시 보일러실로 내려간다. 뭐가 문젤꼬? 분명 훠니스는 새 것이고, 웹에는 소음도 7점 만점에 7점, 내구성(!) 7점 만점에 7점, 에너지 효율성 7점 만점에 7점이라고 나와 있는데... 하긴 마이클 조던이라고 병 안난다더냐... 에이, 최후 수단이다. 배전반의 전원을 끊었다 다시 켜보자. 끄고...15초 정도 대기. 다시 스위치 온. 혹시???

훠니스가 돌기 시작한다. 또 시작하다 말려나? 아니다 계속 돈다. 그러더나 푸학~! 용광로에 불이 붙었다. 회전 속도에도 힘이 붙었다. 오옷! 이거 내가 고친 거야? 아니면 저 혼자 병상에서 훌훌 털고 일어난 것? 아무튼 만만세! 

집안 곳곳의 구멍으로 따뜻한 바람이 밀려 올라오기 시작한다. 아, 따뜻한 공기가 이렇게 반갑구나! 

16도를 가리던 온도계도 17도, 18도로 서서히 숫자를 불려간다. 훠니스 수리업체에 전화해서 약속 취소하고...

한국에 살았다면 이런 헛소동은 치를 일이 없었을텐데...하고 아내가 말한다. 아니, 설령 사람을 부른다고 해도 아마 거기 주소가 어떻게 되죠? 그러면 좀 기다리셔야겠는데요...예? 얼마나요? 한 30분요. 여기에서 거기까지 가려면 그 정돈 걸리겠습니다, 식이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비용은 아마, 몇 만원에 그쳤겠지... 그러니까 처음부터 직접 고쳐보려 만용을 부리지도 않고... 인건비가 싼 - 때로는 아예 없다시피 한 - 한국이 문제인가, 아니면 여기가 문제인가? 

아내에게 시덥잖은 농담 한 마디 날린다. 오랜만에 에어 필터 갈고 보일러 트니까, 청정한 산정에 올라온 것 같지 않아? ...

이 날 이렇게 추웠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얼어버리는 연기. 이를 'ice fog', 곧 얼음안개, 혹은 빙무라고 한다. 으 추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