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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 하루키적 구라, 하루키적 희망, 하루키적 상상력



새우깡 같은 책

"어머 선배, 1Q84 너무너무 재미있어요. 한 번 잡으면 계속 읽게 돼요. 시간 가는 줄 몰라요." 

작년 봄, 에드먼튼으로 놀러 온 두 여후배가 이구동성 - '異口同聲'이자 '二口同聲' -으로 추천한 책이 1Q84였다. 본래부터 무라카미 하루키의 열혈 팬이어서 그의 책 - 물론 다 번역본 - 을 캐나다에 이민 올 때도 끌고 왔고, 캐나다에서 숱하게 이사 다닐 때도 - 바로 앨버타로 건너오기 직전까지는 - 바리바리 박스에 담아 들고 다녔던 나로서는 마땅히 군침을 삼킬 만한 얘기였다. 하루키의 신간이라...그것도 세 권이나 되는, 길 장자 장편, 아니, 대하소설? 후배들이 한국 돌아가면 부쳐주겠다는 걸,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니 그만두라고, 내 한국 가면 직접 사보겠노라고 했었다.

그러다 한국 들어가 처가에 들렀는데 문제의 책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하드커버. 한국은 책도 참 잘 만든다. 값도 싸고... 1권을 슬쩍 들춰봤다. 슬슬 읽힌다. 야나첵의 신포니에타 얘기도 나오고...이런 음악이 있었구나. 한 번 들어봐야지...그러면서 다시 슬슬...넘어가고 또 넘어간다. 꼭 새우깡 먹는 기분. 특별히 맛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자꾸만 손이 가서, 어 새우깡 누가 다 먹었어? 하는 기분... 그래 역시 하루키다. 아무래도 시작하면 대책이 없을 것 같아 일단 접었다. 

캐나다로 돌아오는 길에 읽었다. "이 책 정말 잘 읽히네요," 했더니 "그래요?" 하시더니 큰 처형께서 그 책을 쇼핑백에 넣어주셨다. 책 얻어오는 건 이렇게 하는 것? 하하. 덕분에 오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책에 빠져 애들 건사 제대로 안한다고 아내한테 핀잔도 몇 번 들으면서...

무슨 내용?

1Q84가 어떤 내용이냐 하면...음...이게 참 설명하기 난감하다. 아니 6, 7백쪽씩 되는 책으로 세 권이나 되는데 줄거리를 몰라? 모르는 건 아닌데 이게 설명하기가... 하긴 이 또한 하루키의 무지막지한 내공이거나 외계인적 상상력의 한 증거가 아닐까? 

이게 그러니까 사랑 얘기야. 서로 운명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두 남녀의 이야기. 하도 운명적이어서 두 사람은 우리가 사는 1984년의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 그렇다고 평행우주론에 나오는 것과 같은 세상은 아니고, 달이 두 개 뜨는 다른 세상에서, 온갖 - 육체적이라기보다 대부분은 심리적인 - 간난을 극복하고, 극적으로 만나. 그 다른 세상의 연도는 1984년이 아니라 '대체 이곳은 어떤 세상이냐?'라는 여주인공의 물음(Question)을 반영해서 9대신 Q, 그래서 1Q84년이지. 이 세상에 대해 여주인공이 붙인 이름이기도 해. 한편 남자 주인공은 이곳을 고양이의 세상이라고 부르지. 그러니까, 그 이름은 크게 중요한 게 아니야. 

소설은 두 남녀의 입장을 계속 교차해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돼 있지. 3권에 또다른 인물이 잠깐 끼어들지만 소설의 축은 어디까지나 두 남녀야. 이들이 번갈아 드러내는 생각과 고민은, 독특하다면 독특하고, 심심하다면 심심하고, 극적이라면 극적이야. 하루키의 스타일을 내가 특히 좋아하는 이유는 경제학 - 아니 정치학인가? - 으로 치면 자유방임주의에 가까운 시각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점이지. 

그의 소설에는 이를 바득바득 갈 듯한 절박감이나 위태로움이 없어. 설령 상황 자체가 그래도 그를 묘사하고 풀어가는 하루키의 시선은 늘 한두 발자국 떨어져 있지. 비유하자면, 카페에서 "여기 코카콜라 주세요"했는데 점원이 "손님 코카콜라는 없으신데, 펩시도 괜찮으세요?" 했을 때, 하루키는 뭐 그게 대수로운 일도 아니고, 콜라는 그냥 콜라일 뿐이며 내 인생에 무슨 중뿔난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니니 "그럽시다" 하는 스타일이라는 거지 ('없으신데' 같은 황당한 경어는 요즘 한국 사회의 풍토를 드러내느라 한 번 써봤어). 아등바등 매달리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거야. 문제가 탁 터졌을 때, 또는 뭔가 계획대로 일이 되지 않았을 때, 하루키는 이거 큰일 났네, 이를 어째?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되지? 하고 주인공으로 하여금 허둥대거나 긴장하게 하는 게 아니라, 그 문제가 내가 허둥대고 애면글면해서 바뀔 수 있거나 심지어 해결될 수 있는 것인가를 먼저 따지게 해. 그래서 내 권한 밖의 일이고, 그런 문제는 그대로 가게 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될 때는 주인공으로 하여금 그 흐름에 몸을 맡기게끔 한다는 거지. 말은 쉬운데 실제로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 소설을 이런 식으로 전개해 가기는 더욱 어렵지 않을까? 

사실 그런 제3자적 시선, 한두 발 떨어져서 특별한 감정없이 '강 건너 불보듯' 하는 하루키의 시각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아. 하지만 나한텐 딱이야. 내가 그처럼 매정한 스타일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고, 대체로 사람에 치여 주위의 타인이 사람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딛고 넘어야 할 장애물이나 귀찮은 과속방지턱처럼 여겨지는 인구 과밀의 일본이나 한국 같은 사회에서, 현대인의 심상이라는 게 이렇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지도 모르고... 아무튼 나는 하루키의 그런 태도와 접근법이 '쿨'하다고 생각해.

요즘 읽었거나 읽으려는 책들. 1Q84는 이웃에 빌려줬다. 꼭 읽어보라고...

감상

사실 지금까지 늘어놓은 잔소리가 일종의 독후감이기도 하지만, 하루키가 드러내는 현대인의 황량한 속마음, 그 속에서 불멸의 운명적 사랑을 갈구하는, 아마도 대개는 속절없고 신기루에 불과할 욕망이 1Q84에서는 다소 우화적으로 그려진 것 같다는 게 내 촌평이고 총평이야. 왜 우화냐고? 그 운명적 연인이 여러 우연을 거쳐 행복해지기 때문이지. 그게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하잖아. 이 책을 읽어보면 알게 돼. 이 소설의 설정으로만 보면 '거의'가 아니라 그냥 불가능했어야 옳다고... 그런데 하루키는 전근대적 소설의 필살기인 '우연'을 이용해서 둘을 맺어주지. 하루키도 이젠 나이를 먹은 모양이야. 꼭 현실성을 따질 필요가 있겠는가, 그럴 거라면 소설은 왜 읽어? 어차피 소설은 일견 환타지이고, 현실에서 못 이룬 욕망의 대리 배출구가 아닌가? 

3권 후반으로 가면서 하루키의 필력이 급속히 약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긴 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잘 완투했어. 완봉승은 아니지만 노장의 투혼을 보여준 역투. 하루키 덕에 야나첵의 신포니에타를 챙겨 들은 것도 가외의 수확. 본래 책을 사면 음반을 아예 끼워준다던데, 나는 소설속 주인공이 들은 조지 셸 지휘의 옛 연주대신, 조너선 노트와 밤베르크 심포니가 연주한 신보로 들었지. 

위키피디아에 찾아보니까, 이 신포니에타가 체코슬로바키아 군대에 헌정한 것이라는군. 현대의 자유인, 그의 정신적 아름다움과 기쁨, 힘, 용기, 승리하겠다는 결단력을 표현했다는 거지. 그러고 보니, 하루키의 두 주인공이 운명의 사랑을 찾아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는 그 과정에서, 그들에게 요구된 덕목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네. 

1Q84. 나는 아주 좋게 봤어. 하루키 책을 토론토에 두고 온 게 새삼 후회스럽네. 이젠 영역본을 챙겨봐야 하나? 아니면 아예 일어를 독학해서 원어로 읽어보는 프로젝트를 시작해봐? 아직은 그냥 헛생각뿐. 하루키가 앞으로도 더 책을 많이 써줬으면 싶고, 내년이든 후년이든 노벨문학상 하나 받았으면 좋겠다. 

사족: 양윤옥 아줌마, 번역 정말 잘했더라. 일본 소설의 한국어 번역은 대체로 만족스러운데, 이 아줌마의 내공은 더 대단한듯. 다만 영어를 일본어로 쓴 것을 다시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약간 틀린듯 거슬렸던 대목도 없지만은 않았지만 그 정도 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