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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의 계엄령' - 머나먼 캐나다에서 최승호의 '대설주의보'를 떠올리다

아이팻 앱중 하나인 '웨더캐스터'로 본 일요일 아침의 날씨.


지난 금요일 내리기 시작한 눈은 주말 내내 그치지 않았다. 그치지 않고 줄기차게 내렸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하다는 식상한 표현이 몇 번이나 떠올랐다. 대체 얼마나 더 내리려고 이러는 걸까, 궁금하다기보다 걱정스러웠다. 토요일 밤이 되면서 잦아든 듯하던 눈은, 일요일 오후부터 다시 내릴 기세다. 오후 세 시도 되지 않았지만 하늘이 어둑어둑 하다. 아무리 낮이 짧은 캐나다의 겨울이라지만 오후 세 시에 해가 질 정도는 아니다. 

쉼없이, 망설임 없이, 끈질기고 줄기차게 쏟아붓는 눈은 온 마을과 도로에 벽을 만들었다. 눈 치운 자리 밖으로는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쌓였다. 내 집 뒤뜰로도 나갈 수 없을 정도로 쌓였다. 족히 40cm 이상되는 적설량에다, 간밤새 불어댄 바람이 더한 2, 30cm 높이의 보너스 눈, 게다가 길을 내려 밀어낸 눈까지 쌓여, 뒤뜰로 가는 문의 7할이 눈에 덮였다. 부엌으로 통한 뒷문도 열 수가 없다. 그저 창밖으로 턱밑까지 쌓인 눈을 바라만 볼 뿐이다. 

그렇게 쏟아지는, 쏟아진, 눈을 보면서 자꾸만 '눈의 계엄령'이라는 표현을 떠올렸다. 하도 유명해서 마르고 닳도록 인용된 그 표현이, 그러나 캐나다 전역을 강타한 눈 폭풍을 묘사하는 데 그보다 적절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졌다 (최승호 시인의 시집은 집에 없다). 문제의 표현이 나온 최승호 시인의 시 '대설주의보' 전문을 보기 위해서다. 한 웹사이트에서 시를 찾았다. 하하, 정작 최시인의 표현은 '눈의 계엄령'이 아니라 '백색의 계엄령'이다. 기억의 편집이자, 번안이다. 찬찬히 읽어본다. 



대설주의보
최승호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어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고해문서, 미래사,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