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와 최고 중 하나
한국인들은 ‘최고’, ‘최대’, ‘최악’, ‘최선’ 같은 말을 너무 좋아한다. 말 그대로 지나치게 좋아한다. 거의 유전자로 박혀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강박적으로 여겨질 때도 있다. 아득한 옛날 아직 한국에 살 때, 영국문화원에서 꽤 오래 영어를 배웠다. 거기에서 수강생들에게 낯선 이들과 대화를 터보라고 - 영어로 하면 ‘ice breaker’다 - 하면, 대뜸 묻는 질문이 what is your favourite movie? what is your best memory? what is the biggest city in your country? 같은 식이었다. best, biggest, first, highest, oldest, most beautiful, worst 따위, 최상급 형용사들이 끊임없이, 녹음기 틀듯 흘러나왔다. 나도 물론 그 중 하나였겠지. 오죽했으면 강사가 그런 질문을 던졌을까, “왜 한국인들은 그렇게 최고, 최선, 최대 같은 말을 좋아하느냐”라고? 왜 꼭 뭔가 하나가 가장 빠르거나, 크거나, 세거나, 좋거나, 나쁘거나, 인상적이어야 하느냐고?
뉴스를, 뉴스 공급이 본령인 언론보다 사회 관계망 서비스인 페이스북의 ‘친구’들을 통해 더 자주 접하게 된다는 느낌을 가끔 갖는다. 물론 사실은 아닐 것이다. 여전히 뉴스 전문 사이트들을 통해 얻는 뉴스가 더 많을 게 분명하다. ‘페이스북 친구’는 물론 전통적 의미의 ‘친구’와는 사뭇 다르지만, 어쨌든 그들이 여기저기서 끌어온 뉴스들은, 전통 언론의 보도 방식이나 뉴스 공급 스타일과는 사뭇 다르다. 그보다 훨씬 더 주관적이고, 충격적이고 - 혹은 선정적이고 - 자주 ‘사실이 아닐 것 같다’라는 느낌을 준다. 실제로 ‘설마’ 싶어서 확인해 보면 인터넷에서 떠도는 허풍이나 창작, 거짓말인 경우가 많다.
또 하나 표나게 다른 특징은 페북 이용자/독자들의 감동 - 혹은 억지 감동 - 을 유발하려는 목적을 가진 ‘의사(의사) 뉴스’가 많다는 점이다. 몇 달, 혹은 심지어 몇 년 지난 '재활용' 미담도 많고... 개중에는 자연스러운 감동을 자아내는 내용도 있지만, 너무 작위적이어서 도리어 부담과 반발을 이끌어내는 내용도 많다.
그런 (인위적) ‘감동 유발형’ 포스팅에서 내가 불만스러워 하는 또 한 가지는 앞에 언급한 최고, 최선, 최대, 최악 같은 표현과 직결된다. 이를테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어 단어는?’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표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국어는?’ 따위… 설령 그게 무슨 여론조사를 통해 얻은 결과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 결과가 곧 단 하나의 최고나 최선을 담보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영어의 ‘one of the greatest’ ‘one of the best…’ 같은 표현을 처음 들었을 때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최고나 최선은, 말 그대로 딱 하나밖에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최고 중 하나, 최선 중 하나, 라니, 도무지 논리적으로 말이 안돼! 그런데 지금은 이 표현이 좋다. 열려 있으니까, 무엇보다 최고나 최선을 따지는 일은 대부분 주관적일 수밖에 없고, 하여 사람의 그 때 그 때 감정과 컨디션에 따라 무엇이 최고와 최선인지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으니까…
단정적인 표현보다는 오류와 논박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표현이, 나는 더 좋다. 가령 많은 이들이 역대 최고의 농구선수 중 한 사람으로 꼽는 마이클 조던을 가리킬 때, 혹은 나달, 조코비치와 더불어 종종 '누가 최고냐' 논쟁에 거론되는 테니스 스타 로저 페더러을 소개할 때, one of the best라고 하지 best of the best, simply the best ever, 따위로 쓰지는 않는다. 심지어 greatest of all time을 뜻하는 ‘GOAT’를 쓰더라도, 앞에 ‘arguably’라는 부사를 넣어, 여지를 남겨준다. 그게 옳은 것이고.
아무려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어 단어는?’이라는 제목의 페북 포스팅에 따르면 그 단어는 엄마/어머니란다. 뭐 틀린 주장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가장 아름다운 단어’라는 표현은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가장 아름다운 단어들 중 하나겠지. 사람에 따라서는 아버지, 동생, 아내, 아들, 사랑 같은 단어가 가장 아름답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 않은가.
무엇이든 열려 있는 게, 어딘가 바꾸거나 비집고 들어갈 만한 공간이나 허점이 있는게, 나는 좋다.
죽기 전에 ...해야 할 ...가지
페이스북의 포스팅들을 훑다 유독 불쾌하게 여기는 제목 중 하나는 '죽기 전에 ~해야 할 몇 가지'류이다. 이를테면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몇 권', '죽기 전에 가봐야 할 몇 군데' 따위인데 참 짜증스럽다. 그렇게 말하는 자의 턱없는 오만이 읽혀서 싫고, 무엇보다 이게 최고다라는 단정과 확신의 협량함이 싫다.
오늘 아침 우연히 본 제목은 페이스북의 창업자이자 CEO인 마크 저커버그가 추천했다는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14권'인데, 나는 저커버그가 저런 표현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저커버그의 얄팍함에 실망이고... 책을 몇백 몇천 권씩 읽는다고 그 사람이 곧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책 한 권 안 읽은 사람이라고 바보인 것도 아니고... 무슨 강박관념처럼 이거 읽어라, 저거 읽어라 강권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고, 그런 강권에 조바심 치는 모습도 좋아보이지 않는다.
그냥 저커버그가 추천하는 책들, 정도면 다 알아먹는다. 지금 온라인 세계를 움직이는 유명인사들 중 한 명 아닌가. 빌 게이츠가 띄우는 책들도 마찬가지. 나와 관심사가 맞다면 다 시도해볼 수도 있겠고, 아니면 아, 빌 게이츠는 이런 책들을 읽었구나, 참고하는 것으로 충분할 터이다. 누가 뭘 읽는지, 내가 무슨 책을 읽었거나 읽는지 혹시 누가 물어보면 어쩌나, 신경 쓸 필요나 가치는 별로 높지 않다고 생각한다.
살육과 전쟁으로 얼룩진 것이 인류의 역사이라지만, 그에 못지 않게 엄청난 지적 자산을 쌓아온 것이 또한 인류의 역사 아닌가. 그 깊고 넓은 인류의 지성 세계가, 고작 책 14권으로 대표될 것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설령 열 배, 백 배를 더해 140권, 혹은 1400권으로 늘려도 턱없이 부족해야 마땅하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의 세계는 지적으로 얼마나 빈한한가!
그러니 제발, '죽기 전에 ~해야 할' 따위의 표현은, 가능하면 쓰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