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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부음


아내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 저 짧은 글 안에, 얼마나 많은,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을까 짐작하려 애써 보지만 부질 없다. 토요일 새벽 두 시였나, 세 시였나? 아내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한국에서 온 전화다. 이민 온 지 어지간히 시간이 지난 다음이라 캐나다와 한국 간의 시차를 잘 알기 때문에 한국의 가족이나 친구가 이런 시간에 전화가 걸어 올 일은 거의 없다. 뭔가 비상한 상황이 아니라면...


아니나다를까, 장인 어른의 부음 소식. 아내가 흑, 하고 흐느낀다. 지난 8월의 3주간 한국에 들어갔을 때도, 혹시 모르니까 장례식에 입을 옷 한 벌씩 챙겨오라는 말을 들었던 터다. 그러나 그렇게, 그저 시간 문제였을 뿐, 당신의 병중이 워낙 심각했으므로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이라고 짚어 본다고, 상실의 슬픔과 절망이 크게 위로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쯤 아내는 그 곤고한 심신을 비좁고 불편한 이코노미석에 힘겹게 구겨넣고, 태평양 대해 위를 날고 있으리라. 마음이 착잡하다. 안타깝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조금은 절망스럽기까지 하다. 부음을 전해 듣기 전에, 아직 아버님의 정신이 맑은 상태일 때, 당신과 자식들 간에 사랑한다, 사랑합니다, 너희가 자랑스럽구나, 참 나는 좋은 인생을 살았다, 너희도 나처럼 건강하게 오래오래 잘 살거라, 그런 애틋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부질없는 상상도 해본다. 


장인 어른은 막내 사위를 퍽 대견스러워 하셨다. 그랬다고 생각한다. 캐나다로 이민 와서 공무원으로 생활하는 것이, 당신 눈에는 예쁘게 보였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받은 사랑의 일부분도 돌려드리지 못했다. 암의 병증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다음에도 끝끝내 당신의 병증을 인정하지 않으시는 모습에서, 적이 실망도 했던 것 같다. 철없는 내 눈에는, 현실을 수긍하시고, 좀더 편안한 마음으로 말년을 즐기시고, 한국의 자식들을 더 보듬을 시간을 갖지 않으신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가당찮은 시건방이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좀더 당신을 위로해 드릴걸... 그러나 너무 늦어버렸다. 



장인의 부음은 자연스레, 오래전 겪었던 친부의 부음에 대한 기억으로 이어진다. 성준이는 가끔 묻는다. 나의 아버지 - 그러니까 엄마가 아닌 아빠 쪽 할아버지 - 는 어떤 사람이었느냐고. 특별히 해줄 이야기가 없다. 그리우냐고 묻는다. 가끔은... 


나는 아버지를 임종했지만 실제로는 임종하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맞다.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 내려갔을 때, 아버지는 이미 사경을 헤매고 계셨고, 하여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살풋한 말 한 마디 서로 주고받을 수조차 없었다. 가래 끓는 소리와 끊어질듯 끊어질듯 힘겹게 이어지는 호흡만이 며칠간 계속되었을 뿐이다. 울어도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았다. 악다구니 같이 미워하고 싸우기만 했던 아버지였는데, 그런 관계도 군대를 마치고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누그러든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나도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그러나 나도 아버지도 아무런 살가운 이야기 한 번 건네지 못한 채 그저 데면데면하게 시간을 흘려보냈었다. 그리고 이제는...하고 마음을 바꿀 무렵, 이미 늦어버렸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런 말 한 마디 해드릴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아니, 그럴 기회를 무시했다.



그에 견주면, 그래도 아내는 조금이나마 다행스러운 편이라고 보고 싶다. 한국에 들어갔을 때 아버님을 몇 번 문안했고, 짧은 이야기나마 나눌 수 있었으므로... 나는, 아내는, 동준이와 성준이에게 사랑한다고, 너희를 이 세상 무엇보다 더 크고 깊게 아낀다고,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원없이 말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


아내가 4박5일의 짧디 짧은 일정으로 한국에 다시 들어갔다. 나는 그 동안, 회사에 휴가는 내지 않고 재택근무를 하면서 동준이와 성준이를 건사할 계획이다. 


장인 어른, 아니, 아버님, 한국에 들어갈 형편이 못돼 죄송하기 그지 없습니다. 당신께서는, 정말 훌륭한 삶을 사셨습니다. 언제나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으시고, 늘 공부하려는 당신의 모습에서 저는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제 편안히 쉬십시오. 사랑하고,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