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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설거지하는 아빠가 성공하는 딸 만든다"를 찾아서

오늘, 참 우연하게 한국 언론의 '까이꺼 대충...'주의를 새삼 확인하고 퍽이나 씁쓸했다. 말로만 팩트 팩트 외칠 뿐 실제로는 적지 않은 기자들이 팩트를 확인하는 데 너무 게으르다는 한 증거를 보고 만 탓이다 (기자들이 왜 '사실'이라고 안 하고 굳이 '팩트'라고 말하는지도 나는 자주 궁금하다. '지식인'이라고 해도 되는데 굳이 '인털렉추얼'이라고 고집하던 한 언론인도 문득 떠오르는 순간). 


오늘 본 기사는 이거다. "설거지하는 아빠가 성공하는 딸 만든다"라는 제목의 연합뉴스 2014년 5월30일치 기사. 좋아하는 한 후배의 비디오 포스팅을 보고 찾아본 기사다. 



먼저 이 문장. 


"29일(현지시간) 미국 '심리과학' 학회지 최신호에 실린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의 연구 논문을 보면 어머니가 양성 평등 의식을 어느 정도 갖고 있느냐보다 아버지가 가사 분담을 얼마나 잘하느냐가 딸들의 장래 희망의 다양성을 높였다."


최신호라고? 대체 몇 호냐? 4월호? 5월호? 6월호? 게다가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의 연구 논문'이란다. 대학 명의로 제출한 논문이라는 뜻인가? 이게 말이 되나? 그러면 이런 발견과 결론은 누가 어떤 조사나 연구, 접근법을 통해 이끌어냈을까? 궁금해서 계속 읽어가는데 답이 나오지 않는다. 참고 계속 내려가 보니 끝머리에 이런 문단이 겨우 나온다.


"연구를 진행한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의 알리사 크로퍼드 박사는 "아버지가 양성평등을 옹호하더라도 실제로 집에서 가사분담을 하지 않으면 딸들이 전통적인 여성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간호사, 교사, 사서, 전업주부'가 되기를 선호할 가능성이 높았다"고 설명했다."


이 기사의 근거가 된 자료를 확인하고 싶었다. 여기에서 단서는 '심리과학' 학회지 2014년 '최신호',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알리사 크로퍼드 박사 정도였다 (마치 퍼즐을 푸는 듯한 재미도 없지는 않았지만 언론의 기사가, 더더군다나 명색이 한 나라의 '기간 통신사'라는 데가 이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구글로 'Alissa Crawford, UBC'를 쳐봤다. 저런 기사가 나오지 않는다. 알리사라는 이름이 틀렸나? UBC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가 아닌가, 혹시 내가 미처 들어본 적이 없는 브리티컬럼비아대학이라는 게 미국에 있나 궁금했다. '심리과학' 학회지라는 대목에 주목해 'Psychological Science'를 치니 학회지가 나온다. 기사가 나온 시점 전후 - '최신호'라고 했으니까 - 의 논문들을 찾아보는데 쉽게 나오지가 않는다. 


그러다 'ubc, psychology, alissa'라는 세 단어를 구글에 넣어서 이런 결과를 얻었다. 



첫 줄에 나온 이름을 보니 Alyssa Croft다. 아 찾았다! 알리사가 Alissa가 아니라 Alyssa였구나! 그런데 성을 보니 '코로퍼드'라고 써서는 안되는 이름이다. 크로프트다. 이거 워싱턴특판원씩 하는 사람이 이런 이름조차 틀리게 써서야 말이 되나 싶어 입맛이 썼다. 그뿐이 아니다. 박사라고 했는데 사실은 2015년 박사 학위를 받을 것으로 기대되는 '후보'였다 (PhD Candidate). 아 이건 좀...! 



기사라는 게 재미있어야 하고, 독자의 흥미를 끌어야 한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기본적인 사실 확인 - 사실 필자를 인터뷰하거나 물어볼 것까지도 없는 아주 간단한 철자 확인 - 정도는 했어야 하지 않을까? '심리과학' 학회지 최신호라는, 정말 말도 안 되는 표현대신, '2014년 7월호'라고 했어야 된다는 점은 굳이 지적할 필요도 없겠다. 인터넷 시대임을 고려해 간단한 링크 하나 걸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어쩌면 가망없는 '럭셔리'일지도 모르지만...


정확한 정보 전달이 기자의 임무라면, 독자가 무엇을 원하거나 궁금해할지, 기사를 작성할 때마다 적어도 한 번쯤은 독자의 처지에 서보려 노력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하나마나한 얘기 같아서 좀 멋쩍지만, 그런 최소한의 기본조차 잘 지켜지지 않는 게 요즘 한국 언론의 한 경향처럼 여겨져서 하는 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