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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4월16일


오늘 창비 주간비평에서 이런 글을 봤습니다. 세월호 때문에 더욱 가슴에 와닿더군요. 러쎌 뱅크스의 '감미로운 저세상'에 대한 전남대 유희석 교수의 서평입니다.


'또한 모든 재난이 비극적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의 무너지는 억장은 그 무엇으로도 위로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비극의 무게를 갖는다. 빌리가 말하듯이 그런 비극은 “생물학을 거스르고, 역사와 모순되며 인과관계를 부정하고 심지어 물리학의 기본 법칙과도 어긋난다. 최후의 모순인 것이다.” 어떤 원인에서든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들은 그런 모순과 대면해야 한다.'


'애도는 망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엄밀하게 말해 애도는 뒤에 남은 자가 자신의 여생을 온전하게 살기 위해 망자의 못다 이룬 삶에 바치는 지극한 예(禮)다. 슬픔이, 또는 분노가 지나쳐서 애도가 실패하는 것이 아니다. 그 예를 다하지 못하는 한, 산 자의 한이 풀리지 않는 한 애도는 종결될 수 없다.'


대참사가 우리에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1989년 9월 21일 오전 7시 30분, 미국 텍사스 남부 앨튼 지역에서 주 역사상 최악의 교통사고가 났다. 코카콜라를 실은 트럭에 들이받힌 주일학교버스가 도로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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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글은 소설가 김훈 씨가 이투데이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풍랑이 없는 바다에서 정규 항로를 순항하던 배가 갑자기 뒤집히고 침몰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 원인과 배경이 불분명한 사태는 망자(亡者)의 죽음을 더욱 원통하게 만들 뿐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공허한 것으로 만든다. 망자들이 하필 불운하게도 그 배에 타서 죽음을 당한 것이라고 한다면,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은 아무런 정당성의 바탕이 없이 우연히 재수 좋아서 안 죽고 살아 있는 꼴이다. 삶은 무의미한 우연의 찌끄레기, 잉여물, 개평이거나 혹은 이 세계의 거대한 구조 밑에 깔리는 티끌처럼 하찮고 덧없다. 이 사태는 망자와 미망자(未亡者)를 합쳐서 모든 생명을 모욕하고 있고, 이 공허감은 참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 우발적이라는 공허감, 보호받을 수 없고 기댈 곳 없다는 불안감은 사람들의 마음을 허무주의로 몰아가고, 그 집단적 허무감은 다시 정치적 공략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시행령’을 들여다보면 이 사태에 대한 정부의 두려움이 얼마나 크고 근원적인 것인지 알 수 있다. 사태 초기에 정부는 우선 어쩔 줄 몰라서 갈팡질팡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사태의 심층에 대한 두려움은 점차 노골화되었고, 그 두려움은 다시 그 사태로부터 달아나려는, 권력 방어적인 비겁함으로 발전했고, 그 두려움과 비겁함을 이번에 ‘시행령’으로 명문화해서 입법예고하였다. 이렇게 해서, 지난해 4월에 남해바다 맹골수로에서 온 부고는 수취인 불명으로 팽목항에 되돌아갔으니 탈상(脫喪)의 날은 아직도 멀었고 유족들은 광화문과 팽목항에 모여 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4월이 왔다."

"중국 고대의 전국시대에 수많은 나라들이 멸망했다. 그 나라들은 대부분 반성하는 기능의 마비, 무책임, 무방비 때문에 망했고 여러 나라들이 줄줄이 망해가는 꼴을 보면서 그 뒤를 따라서 똑같이 되풀이하다가 망했다. 고통의 맨살, 죄업의 뿌리와 직면하기를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뉘우침의 진정성과 눈물의 힘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젊어서 기자 일을 할 때 함석헌(咸錫憲·1901~1989)의 이름에 붙은 타이틀은 종교인도 철학가도 사상가도 아니었다. 그의 타이틀은 반체제인사였다. 그 반체제인사가 말했다.

-눈에 눈물이 어리면 그 렌즈를 통해 하늘나라가 보인다. 사람은 고난을 당해서만 까닭의 실꾸리를 감게 되고 그 실꾸리를 감아가면 영원의 문간에 이르고 만다(‘뜻으로 본 한국역사’, 1977. 한길사 444쪽)."


▲2014년 4월 16일 저녁 가라앉는 세월호. 구조와 수색의 조명은 밝았지만 그로부터 1년이 된 지금도 우리의 바다는 여전히 캄캄하다. 사진제공 세계
M.ETODAY.CO.KR|BY 온라인뉴스팀

1년전 4월16일, 세월호를 탔다 비명에 간 젊디 젊은 넋들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