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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Life seems too short


Life seems too short’ - 117세로 세계 최고령 생존자라는 기네스북 기록을 보유했던 일본의 노파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117세 생일 잔치를 치른 지 몇 주 뒤인데, 생일 무렵 언론에 보도된 노파의 인상적인 - 혹은, 보기에 따라서는 더없이 실망스러운 - 코멘트는 ‘인생은 짧다’였다. 


Well, duh~! 


시간이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사실은 거의 누구나 실감하고 또 실감하는, 주관적 진실이다. 괴로울 때 시간은 느리게 간다. 아니, 때로는 정지한다. 화석화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꼭 괴로운 경우가 아니더라도, 이를테면 팔꿈치를 이용한 엎드려 뻗쳐 자세로 복근을 강화하는 간단한 운동인 플랭크 (plank)만 해보더라도, 1분이나 2분이 그보다 더 더디게 갈 수가 없다. 


반면 신나고 즐거울 때, 행복할 때, 시간은 물처럼, 바람처럼 흐른다. 아니, 연기처럼 ‘폭!’ 사라진다. 주말이 언제 지나갔지? How was your weekend? Great! It was just...too short. 휴일을 보낸 뒤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동료들과 나누곤 하는 이런 실없는 대화도 노파가 한, ‘Life seems too short’라는 말의 한 변주를 보여준다.


그렇다. 인생은 짧다. 아마 117년이 아닌 1117년, 혹은 몇만 년을 살더라도 문득 뒤를 돌아보면 마찬가지 심사가 나오지 않을까? 인생은 짧다. 


그래서 문득, 20대나 30대에 운명을 달리한 사람들에 대해 - 꼭 후세에 이름을 남긴 사람이 아니더라도 - ‘그(녀)는 꽉 찬 인생(full life)을 살았다’라고 말할 때, 그것이 정말이었다면, 20년이든 30년이든 ‘짧았다’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 인생의 가치를 따질 때, 단순한 숫자는 종종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그와 연관된다. 


‘덧없는 인생’을 100년 산 사람과,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꽉 찬 인생을 50년 산 사람의 경우, 전자의 경우가 더 긴 삶을 살았다고는 말할 수 있을지언정, 더 유의미한, 더 꽉 찬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의미’가 대체 뭐냐, ‘꽉찬 인생’이라는 게 무엇을 가리키느냐고 묻는다면 또 다른 긴 토론이 필요할 터이다. 하지만 그런 토론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는 직관적으로 그것이 어떤 인생을 가리키는지, 적어도 큰 그림으로는 이해하고 있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생각은 다시, 달리기로 돌아온다. 이것도 직업병? 오늘 본, ‘영감을 주는 어록’인데, 흥미롭게도 지금까지 해온 이야기와 통한다. 


That's the thing about running: Your greatest runs are rarely measured by racing success. They are moments in time when running allows you to see how wonderful your life is. 카라 가우셔 (Kara Goucher)라고, 지금 미국에서 손꼽히는 엘리트 달림이들 중 한 사람이 한 말이란다. 이제 30대 중반인 가우셔의 저 말과, "인생은 참 짧은 것 같아, 117년을 살았어도 그리 길었던 것 같지 않아", 라고 말했다는 저 최고령 노파의 말을 견주어 본다. 


달리기만이 아니겠지만 내가 달리기로 돌연 이야기의 방향을 튼 것은, 주변에서 가끔 듣는 이런 말 때문이다. 뭐 그렇게 죽어라고 뛰냐? 그렇게 오래 살고 싶으냐? … 마치 자신들은 오래 살고 싶지 않다는 듯, 듣기에 따라서는 오래 살지 않는 게 ‘쿨’한 일인 것처럼 묻는다. 달리는 게 그저 오래 살고 싶어서인가? 나도 가끔 자문한다. 그럴지도… 하지만 그보다는 매 순간을, 매일을, 좀더 풍요롭게, 꽉 차게 살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라는 게 더 나은 대답 같다. 그것도 꼭 맞는 답은 아니지만… 


살면서 종종, 아, 나는 얼마나 행운아인가,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라고 스스로 문득 깨달을 때가 있다. 그것은 애먼 사람의 목을 베는 저 지옥에 살지 않아서, 저 천인공노할 자살 충동의 파일럿이 모는 비행기를 타지 않아서, 자살 폭탄이 터진 저 버스 안에 있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가, 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즉자적, 동물적 반응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깨달음이다. 


달리기는 그런 깨달음을, 언제나 내게 안겨준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짧디 짧은 느낌일지라도, 달리는 와중에, 어느 순간에, 아 산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은, 살아서 이렇게 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운인가, 깨닫고 또 깨닫는다. 어쩌면 그런 깨달음을 또 만나고 싶어서, 계속 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삶이 꽉찬 삶이고 유의미한 삶이고 아름다운 삶인가? 사람마다, 사회마다, 시대마다 조금씩 다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들에게 - 여기에는 물론 가족도 포함된다 - 기쁨을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주고, 사회에 유의미한 기여를 하고, 남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으면서 사는 것이 좋은 삶이라는 점은 어느 사회나 시대에 다 통용되지 않을까?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은, 사회에 마치 늪지의 모기 떼처럼 널린 사악한 인간들의 존재로 반증되기도 할테고… 


Life seems too short. 


어떻게 살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