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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연말에 본 영화들


빈 필 신년음악회


유튜브에 재빨리도 올라왔다. 그것도 고화질로. 덕택에 잘 봤지만 저작권법을 준수한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얼마나 오래 살아 있을지는 자못 의심스럽다. 나는 음악보다 도리어 그 음악을 배경 삼아 보여주는 오스트리아의 풍경이 더 인상적이었다. 예전보다 더 다양한 각도와 다양한 이미지 - 특히 오스트리아의 아름다운 풍경 - 그리고 자잘한 재미를 안겨주는 이벤트가 포함된 것은 사줄 만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움'이나 '신선함'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또 주빈 메타야?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찾아 보니 그 동안 무려 다섯 번이나 - 이번 공연 포함 - 신년 음악회를 지휘했단다. 워낙 친화력이 뛰어난 지휘자로 알려진 사람이어서 이해는 하지만 빈필은 다른 소위 '빅3' 혹은 '빅5' 오케스트라들에 견주어 너무 보수적이 아닌가 싶다. 디지털 콘서트 홀로 한참 앞서가는 베를린 필이나, 적극 온라인을 활용하는 로열 콘체르트헤보 오케스트라와 견주면 특히 더 그렇다. 조그만 위험도 가급적이면 피하려는, 'Risk averse'적 기질을 빈필의 전통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까? 새로운 얼굴이 나와서 신선한 음악을 들려주기를 기대하는데, 하기사 요한 슈트라우스 일가의 왈츠만 가지고 꾸리는 음악회가 얼마나 더 신선해질 수 있을지도 다소 의문스럽기는 하다. 빈 신년음악회의 전통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만 지휘자 선정뿐 아니라 음악 선정도 좀더 다양해졌으면 좋겠다 - '모험'까지는 기대하지도 않고 - 라고 바라는데, 물론 가망 없는 것인 줄 잘 안다. ★★★ (별점은 다섯 개 만점)



숱한 영화들 

넷플릭스, 베이코리안즈, 온디맨드코리아, 바다TV 같은 여러 온라인 소스들을 통해 다양한 영화, 애니메이션들을 감상했다. 개중에는 (1) 좋다, 혹은 정말 대단하다, 라고 여겨지는 것도 있고, (2) 여러 모로 아쉬움도 많고 허점도 많지만 그만큼 미덕과 가능성도 많아 보이는, 그래서 퍽 인상적인 것도 있고, (3) 도저히 못 봐주겠어서 한 20분 보다가 접은 것도 있고, (4) 그저 그렇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영화를 본 시간이 아까운 정도는 아니라고 여겨지는 것도 있고, (5) 별로지만 음악이 좋으니까 마치 책장을 후루룩 넘기듯 건성으로 끝낸 것도 있다. 


(1)에 해당하는 영화들: 모모와 다락방의 수상한 요괴들 (한국어 더빙판으로 봤는데 요괴들 중 둘의 목소리를 당시 큰 인기를 누리던 김준현 양상국이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라기보다는 그렇게 선정해 화제를 만들었다, 라고 해야겠지.) 김준현은 역시 연기를 잘한다는 생각. 양상국은 잊혀질 정도로 인기가 없어졌는데,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하나 새삼 궁금했다. 개그콘서트 연습실에서 편집되지 않고 끝내 TV 전파를 탈 수 있는 개그 코너를 짜려고 분투하고 있을까? ★★★★☆


가구야 공주 이야기: 단순하기 그지 없어서 도리어 더 유려하고, 생략이 많아서 도리어 더 상상력을 부추기고, 군데군데 유머와 익살을 넣어서 문득문득 더 슬픈, 실로 빼어난 애니메이션. 특히 앞부분, 가구야 공주가 아직 아기로 뒤집으려 애쓰거나 엉금엉금 기다가 넘어지거나 하는 묘사가, 가히 충격적일 정도로 사실적이고 눈물겨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어떻게 저렇게 적은 선들로 저렇듯 풍요로운 장면을 그릴 수 있을까! 일본 애니메이션의 힘을 새삼 실감하게 만든 걸작. 하기사 저 정도 내공이니 '일본 애니메이션'을 따로 지칭하는 'Japanimation', 'anime' 같은 단어도 나온 거겠지. ★★★★★



군도: 놀랍게도 나는 이 2014년 신작 영화를 고화질의 넷플릭스로 봤다! 온라인으로 고화질의 영화를 합법적으로, 그것도 끊김없이 즐길 수 있게 해주는 넷플릭스에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들도 제법 많이 올라와 있다. 이른바 '한류'의 힘이랄까 영향력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한 증거이겠다. 올드보이, 주먹이 운다, 놈놈놈, 설국열차 등을 비롯해 커피 프린스, 꽃보다 남자 따위의 드라마도 볼 수 있다. 군도는 무엇보다 액션의 사실성, 배경 장면들의 아름다움으로 눈길을 끌었다. 마카로니 웨스턴의 걸작 '장고'(Django)의 한국어 번안판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장면들이 많았고, 배경 음악에서조차 마카로니 웨스턴의 이미지를 숨기지 않았다. 잔인한 폭력 장면도 많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기조는 유쾌하다. 썩어빠진 정권과 탐관오리의 학정에 시달리는, '뭉치면 도적, 흩어지면 백성'인 평민들의 삶을 다루지만, 언젠가 그들의 분노가 폭발하고 말 것이라는 확실한 예감 때문에, 그들의 고통이 비극으로만 비치지 않는다. 영화를 보면서, 당대 한국 사회에서 신음하고 고통 받는 시민/백성/유권자들이, '흩어지면 범죄자, 뭉치면 백성'으로 바뀔 날이 올까, 문득 궁금해졌다. ★★★★★


끝까지 간다 (스포일러!): 한국 영화가 이 정도로 발전했구나, 감탄하게 만든 가작. 이선균, 조진웅의 연기가 빛났다. 죽을 확률이 100% - 그보다 더 높은 확률이 있다면 그 숫자를 쓰고 싶을 정도 - 인 상황에서 악당이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 주인공과 마지막 아귀다툼을 벌이는, 그래서 물론 끝내 죽는 - 상황이 가장 아쉬웠다. 도대체 얘기가 되지를 않으니까... 하지만 운전 과실로 우연히 사람을 죽이고 만 불량 형사 (이선균)가 그 사실을 은폐하려는 상황, 그것이 점점 더 요령부득의 상황으로 발전/악화하는 상황이 박진감 있게 그려졌다. ★★★★


(2)에 해당하는 영화: 주먹이 운다 (스포일러 주의!): 류승완 감독의 영화. 류승범의 독기 어린 연기가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다. 최민식의 연기도 좋다. 워낙 연기를 잘하지만 때로는 열성이 지나쳐 위악적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여기선 그렇지 않다. 아쉬운 것은 서사 구조가 약하다는 점이다. 지나치게 드라마틱한 사연 두 개를 평행 구조로 진행해 가다 마지막에 권투 신인왕전 결승전의 양상으로 충돌시키는데, 의외로 그 마지막이 도리어 지나치게 인위적이다. 힘도 빠진다. 양쪽 다 져서는 안되는 상황이어서 누구를 승자로 삼을 것인가의 의문이 큰 재미 요소인데, 문제는 어느 쪽이 이기든, 현실의 곤고함, 아니, 곤고함을 넘어 막장에 다다른 그 삶에 아무런 희망도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야기는 기승전결에서 전까지만 가다 만 형국이다. 최민식의 신인왕 출전을 도와주는 임원희는 자신의 장기를 내놓겠다는 서약서를 내고 깡패들로부터 돈을 빌렸다. 그런데 최민식이 진다. 그러면 임원희의 삶은 어찌 되는가? 매 맞는 일로 돈을 버는 최민식의 인생은? 영화가 무슨 답을 내놓아야 할 의무는 결코 없다. 하지만 이야기를 펼쳤으면 그것을 접어주기는 해야 한다. 그게 '기승전결'의 '결'이다. 그런데 이 영화엔 그게 없다. ★★★☆


(3)에 해당하는 영화: 빅매치: 이정재가 몸 바쳐 만든 액션 영화라고 해서 열었다. 도대체 저런 말도 안되는 설정으로...! 이정재가 불쌍했다. 대본이나 좀 잘 보고 출연을 결정하던가... 미생의 오과장, 아니 오차장 (이성민)이 여기에도 나온다. 군도에도 나왔었는데... 그러고 보니 이 분이 요즘 잘 나가긴 잘 나가는가 보다. 잘된 일이다. 그렇게 힘든 무명 시절을 거쳤다는데... 하지만 이 영화는 아니다. 액션 시퀀스들조차 영 허당이다. 


I, Frankenstein: 애런 에카트를 좋아한다. 액션 장르도 물론 좋아하고. 빌 나이, 미란다 오토, 제이 코트니 등 좋은 배우들이 많이 나온다. What a waste of talent! 역시 스토리가 약하면 이런 꼴이 난다. 아니면 감독의 재주가 약해서? ★☆


(4)에 해당하는 영화Labor Day: 조이스 메이나드의 소설을 영화로 옮긴 것. 워낙 좋게 본 영화라, 성우제 선배네가 오셨을 때 보시라고 틀어드렸다. 형수께서 특히 좋아하셨다. 나와 아내도 덩달아 다시 봤는데, 역시 좋았다. ★★★★☆ (엄밀히 따지면, '그렇고 그런' 범주에 이 영화를 넣어서는 결코 안된다. 다만 '다시 봤는데도 본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라고 해야겠지.)


(5)에 해당하는 영화: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 넷플릭스에는 'More than blue'라는 제목으로 올라와 있다. 이승철의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라는 노래가 좋아서 영화는 어떤 내용일까 궁금했다. 물론 줄거리는 뻔했지만 그래도 뭔가 개연성이 있지 않을까...? 이 영화의 스토리가 '믿을 만한', 혹은 '그럴듯한' 것이기 위해서는, 주인공인 권상우는 게이이거나, 그를 죽음으로 내모는 불치병이 성 불구와 연관된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전자라면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김보성 흉내를 내서) '으리' 이야기가 될 터이므로, 아마 후자였을 거라고 짐작한다. 짐작하고 싶다. 아, 도대체 대본을 쓴 자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이런 대본을 썼을까? 아니,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되는 후진 이야기가 영화로까지 제작될 수 있었을까? 이것도 이승철의 힘? 그의 노래의 힘? ★☆ (여기에서 온전한, 까만 별은 이승철의 노래를 위한 것.)


한국에서 영화를 본 후배에게 영화가 어땠느냐고 물은 기억이 난다. "노래 빼곤 쓰레기죠"가 그의 대답이었다. 워낙 표현이 거친 편인 친구여서 그러려니 했는데, 직접 확인해 보니 아니다. 노래 빼곤 쓰레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