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읽기

아내의 책장난

며칠전 페이스북의 '책장난' 상대로 아내를 지목했더니 이제사 글을 올렸다. 




학교  다닐 적, 직장 다닐 때, 그리고 지금까지도 계속 못 버리는 버릇이 '벼락치기'다. 숙제나 시험 공부, 원고를 미루고 미루다 직전, 마감이 딱 닥쳐야 부랴부랴, 때로는(주로 젊었을 때 얘기지만) 밤새워 가며 마무리하곤 했다. 약속이 있어도 먼저 가서 기다리기보다는 딱 맞게 시간을 계산해 나선다(물론 그러다 늦는 적도 많다). 매사에 미리미리, 제때제때 일을 처리하는 민첩한 남편과 살며 맞추기 어려웠던 부분이기도 하다. 긴 서설을 마무리하자면, 남편이 숙제를 주었는데 그러면 그렇지, 또 나만 늑장을 부리고 있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책장난‬에 초대를 받고 책꽂이를 훑어보니(최근 읽고 있는 책들은 로맨스 소설이라 인용할 구절이 좀... ㅎ) 이런, 꽤 많은 소장 도서들 가운데 내가 읽은 게 별로 없다는 놀라운(?) 발견을 했다. 이미 읽은 한국 책들은 이민 전후로 거의 처분했고, 7~8년 전부터 주로 공립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봤기 때문이다. 집에 있는 책들은 주로 남편이 좋은 책들을 짬짬이 사 모은 것인데, 항상 "나중에 언제라도 보겠지" 싶어 미뤄 놓게 된다. 


아, 나는 원래 서론이 긴 걸 좋아하지 않았는데 나이가 드나보다. 궁시렁궁시렁 변명이 길었다.


작가 성석제의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을 첫 책으로 꼽는다. 내 나이 페이지에 '딸기'를 제목으로 한 얘기가 나온다. 


"딸기는 맛있다. 정말이다. ...나는 딸기를 좋아한다. 이슬에 젖은 탐스러운 딸기를. 주무숙이 연꽃을 사랑하듯, 이태백이 달을 사랑하듯 사랑한다."


7쪽짜리 이 작은 이야기는 대학시절 지은이가 딸기밭에 가서 일한 경험을 유머러스하면서도 꼬집는 맛이 있게 적었다. 그런데 왜 이 페이지를 골랐냐고? 순전히 다음 구절 때문이다. 


"딸기가 연꽃이나 달보다 좋은 것은 먹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사랑하면 먹을 수도 있어야 한다...."


"사랑하면 먹을 수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 왠지 좋다.ㅎ



먹보인 큰아들 동준이가 아기때 했던 몇안되는 한국말 가운데 하나도 "따알기"였다. 우스꽝스러울지 몰라도 내겐 눈물나게 소중한 기억이다. 딸기 사진이 나온 아기용 그림책을 펼쳐놓고 손에 딸기 한 알을 쥐고 찍은 사진도 있다. 얼마전 16살이 된 동준이는 지금도 딸기를 참 좋아한다. 이제는 "스뜨로베리"라고 하지만. 


사족. 책 안쪽에 2003년 3월 저자의 서명이 있다. 주간지 출판담당기자 시절 두어번 만나뵐 적에 받았던 듯.


두번째 책은 함민복의 산문집 <미안한 마음>이다. 다행스럽게도 47쪽에서 가슴에 와닿는 구절을 찾았다. 


"그래서 그냥 걸었지요. 그냥 발길을 내디뎠죠. 길이 보이지 않으니까 진짜 길이 보이더군요. 길이 보이지 않으니까 길이 더 절실하게 느껴지더군요.


지름길 버리고 살아가다 보면 만날 수도 있는 밤길. 살면서 더러 만나보는 건 어떨까요. 만나 길의 냄새, 길의 소리, 길의 침묵, 들어보는 건 어떨까요."


이런 생각을 늘 염두에 두고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좋을텐데.


요즘 피곤해하고, 짜증 잘내고, 살림에 게을러지고, 남편과 아이들 챙기는데도 소홀하다. 가족과 친구, 지인들께도 연락조차 안하고 지낸다. 여러모로 '미안한 마음'이 크다.


남편이 적극 추천하고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 Maru Press 님과 절친 Young-Gyung Paik, 동갑내기 직장선배이자 책 많이 읽고 글도 잘쓰는 Jeonghee Kim님에게 책장난 바톤을 넘겨도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