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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대로’ 정격음악 거장 로저 노링턴

겁없는 아마추어-대가 경지이른 프로 지휘자 | NEWS+ 1997년 9월18일치

    베토벤의 교향곡들이 다 그렇지만 특히 제5번에 도전하는 지휘자는,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두 부류다. 하나는 아직 뭘 모르는, 따라서 겁없는 아마추어 지휘자이고, 다른 하나는 대가(大家)의 경지에 있는 이른바 프로 지휘자이다.

아마추어와 대가 사이에 놓인 대부분의 지휘자들은 대체로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설 때까지 5번을 뒤로 미루어 놓는다. 37분 안팎의 짧은 교향곡 안에 담긴 그 엄청난 에너지, 숨막히는 긴장감, 장대한 드라마, 그리고 완벽한 구성을 제대로 감당해낼 수 없는 까닭이다.

『도전은 진정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일단 하나의 영역이 정해지면 나는 다른 어떤 이도 끼여들 수 없는 완벽함을 보여줄 각오가 돼 있다』로저 노링턴(63)은 이러한 도전의식과 자신감으로 베토벤 전곡에 도전했고, 89년 그 결실을 맺었다.

EMI의 레이블 특화 전략에 따라 최근 버진 레이블의 「베리타스」(Veritas) 시리즈로 다시 나온 그의 베토벤은 언제 들어도 수연(秀演) 임에 분명하다.

하이든 베토벤 모차르트 등 유명한 ‘체험’시리즈로 명성

먼저 제5번 교향곡을 걸어본다.
「무척 빠르다」는 느낌이 먼저다.

베토벤이 악보에 표시했던 메트로놈 속도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크리스토퍼 호그우드, 존 엘리어트 가디너 등 다른 정격 (正格) 연주자들의 속도도 이에 못지 않은데, 노링턴의 것은 좀 더 팽팽하게 당겨져 있다는 느낌을 준다.

베토벤 시절의 악기를 그대로 재현했기 때문에 푸짐하고 화려한 울림을 주지는 못하지만 대단한 집중력과 기복 큰 다이내믹이 이를 상쇄하고 있다.

가디너 호그우드 아르농쿠르 등과 더불어 정격연주계를 이끌어온 중견 지휘자로 꼽히는 노링턴은 무엇보다 독특한 이력으로 눈길을 끈다.

영국 옥스퍼드 태생인 그는 음악적인 집안의 내력 덕택에 열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공부했다. 게다가 케임브리지의 클레어 칼리지에 성악 장학생으로 입학할 만큼 좋은 목소리를 지녔다. 그는 대학합창단 활동과 영문학 공부를 벙행했으며 지휘에도 열심이었다. 여기까지는 그리 독특하달 게 없다.

대학을 나온 뒤 노링턴은 출판사에 취직했다. 여전히 지휘봉은 놓지 않았고, 1962년에 쉬츠합창단을 결성할 만큼 성악에도 적극적이었지만 아프리카 지사로 발령받게 될 때까지 그는 출판에 대한 관심을 접지 않았다.

노링턴은 아프리카에서 돌아왔다. 직업적인 성악가와 지휘자로서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노링턴은 쉬츠합창단의 리더로, 또 69년 창립된 켄트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으로 15년 동안 착실하게 실력과 명성을 쌓았다. 그가 켄트오페라 에서 공연한 몬테베르디의 「포페아의 대관」은 세계 최초의 정격 연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를 최고 수준의 정격음악 지휘자로 부각시킨 결정적 계기는 78년 스스로 결성한 「런던 클래시컬 플레이어즈」(LCP) 였다. 원전악기로 당대의 연주를 재현하는 것이 LCP의 목적이었다.

85년 노링턴은 LCP와 함께 그 유명한 「체험」 시리즈를 시작했다.「하이든의 체험」이 개막 테이프를 끊었고 87년에는 「베토벤의 체험」이, 88년에는 「베를리오즈의 체험」이 이어졌다. 각 작곡가의 주요 작품들을 당대의 악기와 편성으로 연주하면서, 이제껏 연주되던 것과는 전혀 다른 하이든(혹은 베토벤 베를리오즈)을 보여주는 야심만만한 기획이었다.

89년에는 「모차르트의 체험」이 이어졌으며 모차르트의 해였던 91년에는 「1791년의 모차르트」라는 제목으로 뉴욕에서 더욱 심도있는 체험이 이루어졌다.

노링턴은 브람스와 퍼셀을 거쳐 어느새 바그너에까지 이르고 있다. 지난해 선보인 바그너악극의 대표곡 모음은 1880년대 빈필하모닉의 악기 편성을 재현했는데, 보통 9~11분대에 연주되는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전주곡을 8분대의 속주로 마무리하는 등 적잖은 화제를 낳았다.

노링턴은 요즘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듯하다.

런던필하모닉 애틀랜타심포니 버밍햄시립교향악단 남독일방송교향악단 밤베르크심포니 빈필하모닉 체코필하모닉 등 세계 유수의 교향악단 을 하루가 멀다 하고 객원 지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격연주와 현대 오케스트라의 연주 사이에서 새로운 도전 영역을 찾은 것일까? 김 상 현 기자

아래 유튜브 비디오는 작년 BBC 프롬에서 로저 노링턴 경과 독일 슈투트가르트 라디오 심포니가 연주한 말러 9번 실황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