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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지금의 남한은 결코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

잠시 죽기보다는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하겠다...


고 김대중 대통령이 독재에 항거해 형극의 길을 걸으면서 했던 말이다. 그러나 말이 쉽다. 이를 행동으로 옮기고, 자신의 삶 속으로 온전히 체현한 사람은 거의 없다는 점이 그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권불십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틀렸다. 박근혜를 보고, 김기춘을 보라. 


아마도 그래서, 수많은 (의사[擬似]) 지식인, 사이비 정치인, 쓰레기 기자들이, 속으로는 분명히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눈앞의 이익을 위해, 당장의 안위를 위해, 당대의 권력에 빌붙기 위해 불의와 타협할 것이다. 아니, 타협 선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일삼아 나서서 불의를 저지르고, 인종지말자적 횡포를 자행하는 것일 테다. 



'국민과 함께하는 정의의 파수꾼'이란다. '헌법을 수호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지켜주는 곳'이란다. 이번 정당 해산 결정은 위에 한 말을 정면으로 뒤집은 패악 아닌가? 헌법을 박살내고, 국민의 기본권을 훼손하는 곳이 되고 만 것 아닌가?


한국의 헌법재판소라는 기관이 정당을 해산했다. 21세기에, 언필칭 자유민주주의 사회라는 데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실로 수치스럽다.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럽다. 서로 욕하면서 닮는다고, 무늬만 다를 뿐 북한의 김씨 족벌 정권이 저질러온 작태에서 그리 멀리 가지 못한 양상 아닌가. 3대 세습을 비판하던 한국의 그 맹렬한, 소위 보수 세력은 ('소위'라고 한 이유는 이들 또한 사이비라고 생각하기 때문), 정작 3대, 4대 세습으로 면면히 이어지는 한국 재벌가와 교회 권력의 양태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한다. 아니 때로는 찬양하고 부추기기까지 한다. 수십 수백억을 쏟아 부어 강을 부러 오염시키면서 - 정화하는 게 아니라 - 다른 쪽으로는 초등학생들의 점심값을 빼앗는다. 


세월호의 참사로 죽음보다 더한 비통함에 빠진 부모들에게는 '지겹다 그만해라'라고 윽박지르면서, 북한 인권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짖어대는 자들의 심사는 대체 무엇인가? 이렇게 묻는 이유는 그 심사에서 진정성보다 정치적 잇속이 더 노골적으로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다. 말만 앞세우고, 그것을 실제로 구현하기 위한 계획과 접근법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삐라로 인권법 만들라고 짖으면 그만인가? 


헌법재판소라는 곳의 용서 받지 못할 패악이 하도 기막혀서, 난데없이 한국의 헌법을 들여다봤다. 전문부터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문을 읽으면서, 박통 시절에 외우도록 강요 받았던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운운'에서 그리 멀지 않은, 허황함과 무의미성을 느꼈다. 동원하는 단어가 거창하고 추상적일수록, 그 단어의 진정성과 힘은 그만큼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아무려나, 제3조에 와서 다시 걸렸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대체 이게 무슨 비현실적인 헛소리냐? 엄연한 현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을 없다 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고 강변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북한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평화 통일'을 꿈꾼다? 


문제는 정당에 대해 언급한 헌법 제8조다. 특히 제4항,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될 때에는 정부는 헌법재판소에 그 해산을 제소할 수 있고, 정당은 헌법재판소의 심판에 의하여 해산된다'라는 내용이다. 이 조항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민주적 기본 질서'가 무엇인지부터 명확하게 정의해야 한다. 대체 이게 무슨 뜻이냐? 무엇이 민주적 기본 질서이고, 무엇이 그것을 위해하는 것이냐? 박근혜를 욕하고, 북한 정권에 대해 우호적인 발언을 하면 그게 민주적 기본 질서에 위배되는 거냐? 



헌법 전문에는 '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말이 세 번 나온다. 맨앞 전문에 한 번, 제4조에 한 번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 그리고 제8조에 한 번. 민주적 기본질서가 무엇인지를 조금이나마 더 구체적으로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은 '자유'라는 단어를 덧붙여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고 한 제4조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핵심 항목은 무엇인가. 헌법의 제2장에 나오는 '국민의 권리와 의무'가 이를 상당 부분 설명해주고 있지 않은가. 몇 가지만 예로 들면 이런 것들이다.


  •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행복을 추구할 권리,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 (10조)
  •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17조)
  •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아니할 권리(18조)
  • 양심의 자유(19조)
  • 언론 출판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21조)
  • 학문과 예술의 자유(22조)
  •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34조)

과연 통합진보당이 위에 열거한 - 다는 아니지만 -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항목들 얼마나 심각하고 구체적으로, 물리적으로 위배했는가? 가령 '북한은 좋은 나라다'라거나, '김정은은 위대한 지도자다,' 라고 발언하는 것, 혹은 더 나아가 혁명을 획책했다는 이석기의 선동적 발언이나 계획이, 과연 얼마나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위배'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은 표현의 자유이고, 그 조건 안에서 주장하고 반박하고 재반박하면서 논리와 이론의 가치와 품질을 높여가는 것 아닌가. 도대체 지금 이 시대, 수백만 명이 굶어죽어가는 북한을 동경하고, 그런 참변을 초래한 북한 정권을 찬양하는 자들이 얼마나 되며, 설령 그렇다 한들, 그들의 찬양과 주장을 보장하고, 그에 대한 반박과 비판을 용인하는 것이 그렇게나 어려운 일인가? 

남북 분단 이후의 정치 상황을 따져볼 때, 지금 북한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참변이, 수백만 주민들의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일정 부분 남한 정권들의 정치적 술수와 책략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지 않은가. 정권의 위기가 올 때마다 북한의 남침 위기를 들먹여 절묘하게 사태를 모면하곤 했던, 남한 독재 정권들의 추잡한 과거사에 견주어 보면, 통합진보당의 좌파적 - 혹은 이른바 '종북적' - 행보는 더할 나위 없이 유치하고 낮은 수준의 소음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한국의 건강한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는 도리어 약이 될 수도 있는... 그런데,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단지 현 정권의 눈치에 굴복해 정당을 해산해 버리는 패악을, 그것도 한 나라의 헌법을 재판한다는 기관에서 자행했다. 이들은 과연 '역사의 심판'이라는 말을 들어나 본 것일까?

박근혜 정권의 부도덕성, 무능함, 반민주적, 반인륜적 속성과 작태는 이미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럼에도 현 정권에 빌붙은 자들은, 그나마 식은 밥이라도 얻어먹는 (혹은 얻어먹으려는) 자들은 눈앞의 이익과 한줌도 안 되는 권력을 행사해 보려고 발버둥을 친다. 이들에게는 '영원히 사는 길'은 고사하고 '박근혜 정권 이후'조차 안중에 없다. 지금 당장 좁쌀만한 이익과 권력이라도 챙길 수만 있다면 어떤 패악이든 스스럼없이 저지를 준비가 돼 있다. 

하기사, 박근혜 정권 뒤에 민주적 정권은 고사하고 현재의 야당 정권이 권력을 잡으리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잡는다고 한들, 지금의 야당 집단이 박근혜 정권보다 더 나으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어 보인다. 지금 당장, 어떻게든 당대의 권력과 손을 잡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다는 결의는 거기에서 비롯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 권불십년은 개에게나 던져줄 헛소리일밖에... 

한 마디로 결론을 내리자. 지금의 남한은 결코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