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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모창 가수들의 경연이 ‘위대한 성전’이라고?

과공비례(過恭非禮), 지나친 공손은 오히려 예의에 벗어난다는 뜻이다. 한국의 TV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이른바 ‘페친’(페이스북 친구)들의 인삿말이나 칭찬, 댓글들을 보면서 그 사자성어를 수없이 떠올린다. 


주부님, 고객님처럼 아무데나 ‘님’을 붙여대는 존대 과잉병이나, 이 방이 따뜻하십니다, 이 쪽이 시원하십니다 따위의 비문 남발병은 더 이상 잘못이나 실수가 아니라 마치 당연한 일상적 표현으로 굳어진 것처럼 보인다. 


요즘 즐겨 보는 예능 프로그램 중에 ‘히든 싱어’라는 것이 있다. 유명 가수를 모창하는 사람들을 데려다 경쟁을 시키는 프로그램인데, 방청객들의 연출된, 좀 과장된 ‘리액션’과, 결과 발표를 질질 미루는 전현무의 유치하고 짜증스러운 진행 방식이 가끔 거슬리긴 하지만 그 나름 쏠쏠한 재미를 주는 프로그램이다. 



어제 저녁, 이번에는 누구를 모창했나, 하고 프로그램을 찾았더니 벌써 그간의 모창 우승자들을 모아 재대결을 벌이는 ‘왕중왕 전’이 다음 주라며 지난 경연 대회 우승자들을 소개해주는 일종의 맛보기로 프로그램을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주 결승전을 예고하는 전현무의 표현이 실로 ‘헉!’ ‘이럴수가!’ ‘경악’ ‘충격’ 따위의, 요즘 언론의 기사 제목을 떠오르게 했다. 


다음 주에 시즌 2의 히든싱어 우승자들이 모여 “위대한 성전”을 벌일거라고 하는 게 아닌가?! 위대하다는 대목까지는 접어준다 치자. 하지만 모창 가수들의 일개 예능 경연이 어떻게 ‘성전’이 될 수 있는지 여간 당혹스럽지 않았다. 난데없는 수치심에 내 볼이 다 벌개지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일개 예능 프로그램의 찧고 까부는 놀이까지 ‘거룩한 사명을 띤 전쟁’, ‘종교적 이념에 의하여 수행하는 전쟁’으로 표현되는구나!


시청률에 목맨 자들의 언어 오용과 남용, 훼손의 작태가 어디 이뿐이랴! 유재석을 ‘유느님’이라고 부르는 예능판의 꼬라지를 보거나 (나도 유재석을 좋아하지만 그를 국민MC니 유느님이니 치켜세우는 작태는 정말 역겹다), 히트곡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밖에 안되는 한물 간 가수들조차 ‘국민 가수’ ‘발라드의 신’ '국민 로커' 따위로 표현되는 현실, 성형수술로 도배한 얼굴과 몸매로 벗다시피 하고 나오는 이른바 ‘얼짱’ 연예인들에 대해 시도 때도 없이 ‘여신’ 칭호를 붙이는 언론 - 정말 이들이 언론이기나 한 거냐? - 의 게으름과 직무 유기는, 그것을 지적하며 핏대 올리는 나의 정신 건강만 해칠 뿐이다. 말과 글을 바르게 써야 한다는 대명제는 시궁창에 박혀 질식사한 지 오래다. 


옛날 이어령 씨가 ‘문학사상’ 권두언으로 쓴 글을 기억한다. ‘주어와 동사만으로 이뤄진 글을 쓰고 싶다’라는 바람을 적은 글이었다. 대학 2학년 때던가, 그 글을 처음 읽고 큰 충격을 받았었다. 현란하되 실체를 과장하거나 흐리기 일쑤인 형용사와 부사의 미사여구를 버리고, 군더더기 없이 뼈만 남은 글을 쓰고 싶다는 바람은, 아마 수많은 글쟁이들의 꿈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갈 것도 없다. 아니, 갈 수도 없다. 어찌된 일인지 한국의 말과 글의 풍토는 그 반대로 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실속은 없이 과장과 허사들로 넘쳐나는 위선의 시장...그 시장에서 바른 말과 글은 설 땅을 잃고 서서히 죽어간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고 소박하게 표현하는 말과 글을 듣고 보고 싶다. 가망없는 꿈일까? 


히든싱어 왕중왕 전을 광고하던 전현무도, 아니 전현무에게 그런 표현을 안겨준 소위 ‘방송작가’라는 자도 위대한 성전 따위의, 허망한 잡소리 대신 ‘치열한 경연’이나 ‘긴장과 재미를 한껏 안겨줄 일대 경연’ 따위로 표현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던 것일까? 말과 글의 허위과장 사태가 이미 도를 넘어버린 상황에서, 그런 말들은 너무 ‘약하다’라고 여겼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