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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얘기

깊어진 새알밭의 가을

어제와 오늘, 아침 10시가 가깝도록 푹 잤다. 피곤했다. 별로 한 일도 없는 것 같은데, 몸도 마음도 늘어지기만 했다. 새 직장에 적응하느라 생긴 심신의 부담 탓일까? 아니면 오후로 바꾼 달리기 일정 탓? 


아침에 일찍 출근해 회사 근처와 스탠리 공원을 달려볼까 생각했지만 막 다니기 시작한 회사의 라커룸에 아직 들어갈 수 없는 데다, 설령 들어갈 수 있게 된다고 해도 5층짜리 빌딩에 달랑 하나뿐이라는 샤워 부스가 영 부담스러웠다. 일단은 퇴근 후에 뛰기로 했는데, 역시 달리기에 가장 안좋은 때가 퇴근 후라는 점을 새삼 확인했다. 피곤했기 때문이다. 하루 일과의 피로에다 한 시간 넘는 퇴근 길의 피로...에도 불구하고 뛰러 나가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어쨌든 뛰었다. 생각이 많으면 몸이 더뎌진다. 그래서 퇴근하면 옷부터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던 것인데... 그런 달리기가 몸에는 무리였던 걸까? 


어쨌든 금요일 밤을 공항에서 새다시피 해서 피로가 쌓인 탓에 토요일을 거르고, 토요일 저녁에 이런저런 짐 꾸리기 탓에 또 피곤하다는 핑계로 일요일도 걸렀다. 그러다 겨우 오늘에서야 시간을 내어 뛰러 나갔다. 더 이상 빠질 수는 없다는 위기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깊어진 새알밭의 가을, 레드 윌로우 트레일의 가을 풍경을 꼭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침엽수로는 드물게 가을마다 잎을 지우는 낙엽송. 여기 이름은 타마락(Tamarack)인데, 가을녘 샛노랗게 물든 가늘디 가는 바늘잎들이 여간 아름답지 않다. 


잔디 위를 뒤덮은 포플라 잎들. 포플라는 자작나무, 물푸레나무, 느릅나무 등과 더불어 알버타 주에 지천으로 자라는 나무인데 (그 중에서 목재로서의 가치는 가장 떨어진다), 모두 노란 빛으로 물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세인트 앨버트를 가로지르는 '레드 윌로우 트레일'은 스터전(Sturgeon) 강을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대각선 방향을 이루며 나 있다. 그 트레일을 한 바퀴 온전히 돌면 20 km가 약간 못된다. 마라톤 훈련을 하기에는 조금 짧은 거리다. 노쓰 사스카체완 강변을 따라 수백 km에 걸쳐 트레일이 조성되어 있는 에드먼튼과는 비교가 안된다. 트레일의 길이뿐 아니라 다양성 면에서도 새알밭은 너무 단조로웠다. 그게 아쉬움이었다. 위 사진에 나온 그럴듯해 보이는 집은 스테이트 하우스다. 값이 너무 비싸 가볼 엄두를 못냈다. 


낙엽송의 바늘잎들이 마치 노란 꽃가루처럼 깔린 트레일 위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혹은 걷거나 혹은 뛰거나 혹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자작나무 잎들이 융단처럼 깔린 트레일. 늦은 아침의 햇살이 더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해 주었다. 나는 햇살을 받은 잎이나 잎들 뒤에서 해를 보고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 햇빛을 받은 잎들의 반투명한 속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햇빛보다 더 좋은 조명은 달리 없다. 


바로 이런식이다. 직사 광선은 나무 줄기로 적당히 가린 상태에서 해가 비치는 쪽으로 카메라 렌즈를 대는 것. 그렇게 해서 보이는 햇살 가득한 풍경은 실로 눈부시게 아름답다.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