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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얘기

집을 사다

둘러본 어느 타운하우스의 침실에서 내다본 노쓰밴쿠버의 산자락 풍경. 밴쿠버 이웃동네가 아니라 어느 궁벽한 산촌에 온 듯한 착각을 잠시 불러일으키는 풍경이었다.


108


지난 목요일 한나절, 살 집을 찾느라 노쓰밴쿠버에서 차로 돌아다닌 거리가 108 km였다. 한편, 오늘(일) 아침 8시15분에 아내와 아이들을 싣고 새알밭으로 날아간 웨스트젯의 비행편이 108이었다. 그저 무의미한 우연이겠지만 지난 며칠 간의 고민, 타이밍과 맞물려 '백팔번뇌'의 108과 자꾸 연결되는 심사를 어쩔 수 없었다. 


집을 샀다. 목요일 하루 휴가를 내서, 아이들을 데리고 밴쿠버로 급히 날아온 아내와 함께, 공항에서 빌린 미니 밴으로 현지의 부동산 중개인을 따라다니며 집들을 봤다. 중개인은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됐는데, 한국 분이면서도 현지 사정에 밝고 우리의 상황과 취향을 잘 고려해 볼 집을 미리 골라놓았다. 타운하우스는 주로 학교와 가까우면서도 조용한 엔드 유닛을 찾아 놓았고, 우리 예산을 넘어선 수준이긴 하지만 우리가 좋아할 법한 집도 한 곳 찍어놓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부동산의 경우만큼 잘 들어맞는 경우도 드물 것 같다. 비좁고 옹색한 공간인데도 광각 렌즈로 찍어 전문 요리사의 호화 부엌처럼 사진을 찍고, 작고 변변치 못한 집에 으레 붙는 'cute as a button'이라거나 'cozy'라는 표현을 달았음에도 넓디 넓은 맨션처럼 보이게 만들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집 내부나 외형보다 더 중요한 주변 환경을 그저 부동산 중개업자의 번지르르한 표현과 지도만으로 '감' 잡기란 결코 쉽지 않다. 구글 위성이나 스트리트 뷰 덕택에 주변이 공장 지대인지, 분주한 4차선 도로가 지나가는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게 됐지만 평범한 주택가처럼 보이는 경우는 직접 가서 그 분위기를 체감해 보지 않고는 제대로 알 도리가 없다.


mls.ca에 실린, 우리가 마음에 들어한 집의 사진들.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실제가 더 그럴듯하게 보인 경우였다. 대개는 그 반대인데... (각각의 사진은 아래 '더보기' 안에 넣어놓았다.)


이번 집 구경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보통사람들의 포르노 사이트'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인기있는 '다중 주택 매물 서비스' (mls.ca)를 하루에도 몇 차례씩 들어가 매물을 검토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곳들을 여러 군데 찍어 중개인에게 직접 보여달라고 부탁했지만 그 중 절반 정도가 퇴짜를 맞았다. 그 사이트의 설명과 사진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들 때문이었다. 실내는 넓고 그럴듯해 보였지만 가운데 유닛이어서 너무 시끄럽고 불편하다든가, 사진으로 확인한 것보다 길이 더 가깝고 시끄럽다든가, 한 블록 건너 주유소와 세차 센터가 있다든가, 세를 준 집이어서 집 상태가 안좋다든가, 대중 교통을 이용하기가 너무 불편하다든가, 새로 지은 단지지만 개발업자가 집을 부실하게 짓는다고 평판이 난 경우라든가... 물론 개중에는 이미 팔렸는데도 미처 업데이트가 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타운하우스는... 역시 아니었다.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독주택에서 산 탓도 있겠지만 대체로 좁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공간을 넓어보이게 하려고 거실 한 쪽 벽 전체를 거울로 단 경우도 있었지만 그게 도리어 더 답답했다. 주차장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동선이 비효율적이라거나 - 배달이 흔한 한국과 달리 여기서는 물건을 사면 직접 들고 집안까지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주차장과 집까지의 거리가 중요하다 - 바닥이 나무가 아닌 라미네이트라거나, 유닛과 유닛 사이가 너무 좁다거나, 월 관리비가 너무 비싸다거나... 아무튼 흠을 잡으려니 끝이 없었다. 하나가 좋아 보이면 다른 하나가 아쉬웠다. 보기로 한 타운하우스가 하나둘 줄어드는데도 우리 마음에 드는 곳이 나타나지 않았다. 오늘 못 구하면 어쩌나, 하는 근심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금요일 하루 더 여유가 있었지만 그렇게 볼 만한 매물이 나와 있지를 않았다. 노쓰밴쿠버 지역이 그만큼 작기도 했고, 우리 구미와 형편에 맞는 집/타운하우스가 그만큼 없기도 했다. 콘도(한국에서는 흔히 '아파트'라고 부른다)는 십중팔구 실내 공간이 너무 좁았고, 좀 넓다 싶은 경우에는 매달 내야 하는 관리비가 50만원을 넘기 일쑤였다. 결국 타운하우스가 답인데, 공간이 넉넉하다 여겨져 찾아놓은 곳들이 기대 수준에 못미쳤다. 80만달러 이상을 호가하기 일쑤인 단독주택으로 눈을 돌리기에는 우리의 재정 형편이 그에 미치지 못했다.


집 보러 다니던 중 잠시 틈을 내 근처 '딥 코브'(Deep Cove)라는 델 왔다. 산속에 폭 잠긴 커뮤니티의 분위기가 아주 조용하고 평화롭게 보였다.


보기로 한 타운하우스를 다 소진하고, 고치고 들어가지 않으면 살 수 없을 정도의 '흉가' 한 곳을 보고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신발을 신고 들어가야 했고, 위치조차 대로변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안 가격이 70만불이었다! 미친 거 아냐? 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 중개인은 대로변이지만 나무와 생울타리로 주변이 잘 둘러싸여서 생각보다 소음이 적고, 5, 6만불 들여 실내를 잘만 고치면 괜찮을 것 같아서 보여주는 거라고 했다. 하!)


마지막으로 집이 하나 남았다. 나온 지 열흘 됐다고 했다. 나나 아내는 찾는 집의 가격대를 대개는 70만불, 어쩌다 높게 잡은 경우에도 75만불로 잡았기 때문에 mls.ca에서 본 적이 없는 집이었다. 지난 2월 81만불에 나왔다가 팔리지 않자 잠시 들어갔다가 76만9천불에 다시 나온 집이라고 했다. 그럼 이건 완전히 우리 예산 밖인데, 그래도 온 김에...


아내도 나도 이 집이 마음에 들었다. 실내 구조도 좋았고, 1950년대에 지은 집 치곤 전체적인 상태가 괜찮았다. 부분적으로 고쳐놓은 응접실의 마루바닥, 천장의 유리를 통해 햇빛이 들어오는 널찍하고 천장 높은 패밀리 룸도 좋았다. 뒤뜰도 깔끔했고, 화장실 하나를 사이에 놓고 모여 있는 방 세 개, 집 안 가운데 배치된 가스 벽난로도 마음에 들었다. 집안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구조가, 우리의 취향과 더없이 잘 맞았다. 느낌이 좋았다. 이것도 궁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마음에 들어한 집을 향해 걸어가는 중. 앞장선 김동준의 '끈놀이' 폼이 마치 굿을 하는 사람 같다. 



아내는 집은 마음에 들지만 너무 비싸다고 고개를 저었다. 50만에서 60만, 65만, 다시 70만까지 예상 집값을 높이며 거래 은행측과 얘기를 해온 나로서도 그 집은 '畫中之餠'이었다. 75만불 정도에 offer를 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중개인이 우리를 부추겼다. 일단 은행과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집값을 감당할 만큼의 주택 융자금을 받아낼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게 당연했다. 그 동안 계속 우리집의 가계 수입 수준으로는 빠듯하다며 난색을 표명해 온 거래은행과 달리, 노쓰밴쿠버의 다른 은행측 직원은 '이 정도 가계 수입과 재정 상태면 충분하십니다'였다. 그래도 매달, 아니 2주마다 갚아야 하는 원금과 이자가 너무 세지 않느냐고, 아내가 걱정했다. 물론 나도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현재 나와 있는 타운하우스 중에는 우리가 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80만달러 미만이면서 이 정도 상태로, 그것도 이 정도로 조용하고 주변 환경이 좋은 지역에 자리잡은 집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밴쿠버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나갈 생각이 아니라면, 굳이 노쓰밴쿠버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라면, 어쨌든 '질러보자'가 답이라고 여겨졌다. 


토요일 아침, 주택 검사를 하느라 다시 집을 찾았다. 장인어른도 집을 마음에 들어 하셨다. 성준이는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바빴다. 우리 새집이 될 거다, 마음에 드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은행측의 'O.K.' 사인이 났지만 어쨌든 집을 적어도 한 번쯤은 더 보고 판단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두 시간쯤 뒤, 그 집에 다시 갔다. 역시 마음에 들었다. Offer를 내기로 했다. 


이후 다시 세 시간여 동안, 제안과 역제안, 그리고 기다림으로 점철된 '주택 구입을 위한 필수 통과의례'가 이어졌다. 집은 일요일에 오픈하우스를 하기로 돼 있었고, 그럴 경우 집값이 더 올라갈 수도 있으리라는 게 우리 판단이었다 (마음에 들어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다 그렇게 예상하게 마련이다). 아내와 아이들이 일요일 아침에 돌아가기 때문에 그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목요일 중에 담판을 지어야 했다. 우리에게 유리하다면 유리할 수도 있는 한 가지 변수는 그 집에서 40년 넘게 살아온 주인이 고령의 독거 노인으로, 오픈하우스 같은 상황을 좋아 하지 않으며, 이미 작은 아파트를 사놓은 처지여서 하루라도 더 빨리 집을 팔고 나가고 싶어 한다는 점, 그리고 집을 팔려다 실패한 경험이 있어서 집을 사겠다는 제안에는 일단 적극적으로 응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81만불에 내놓았을 때 거의 팔 뻔했는데 2천불 차이 때문에 거래가 깨졌다는 풍문도 있다고 중개인은 알려주었다. 집 주인은 80만불을, 사려는 이는 79만8천불 (아니면 79만불 대 78만8천불)을 제시했으나 끝내 접점을 찾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아이들은 왜 우리가 여기에 와 있는지에 대한 감각이 별로 없다. 성준이는 그나마 우리가 새로 살 집을 찾는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지만 동준이는 그렇지 않다. 두 아이가 다닐 만한 학교도 다 집에서 멀지 않다.


결국 샀다. 우리의 제안은 75만불, 저쪽의 역제안은 76만5천불, 우리는 다시 76만불, 저쪽은 다시 76만2천불...하지만우리는 76만불에서 더 못가겠노라고 버텼다. 다시 2천불 때문에 깨질 수도 있는 상황. 그런데 이번에는 주인이 오케이를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집에 대한 노쓰밴쿠버 지구 (District of North Vancouver)의 공식 감정가가 바로 76만2천불이었다. 땅값이 72만불, 집값이 4만몇불... 참, 노쓰밴쿠버도 다시 시와 지구로 구분되어 있고, 우리 집은 지구에 속해 있다).


집에 대한 구매 계약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주택 검사 결과 집에 큰 하자가 없어야 하고, 무엇보다 주택 융자금이 승인을 받아야 했다. 토요일 오전, 주택 검사 결과를 놓고 집 주인과 다시 실랑이를 벌인 - 물론 그 양측 부동산 중개인을 그 사이에 놓고 - 일은 시시콜콜하게 쓰고 싶지 않다. 집 주인이 한 집에 오래 살았다는 점은 집 자체로서는 장점일 수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단점도 많다는 점을, 이번 거래 과정에서 확인했다. 집 매매 계약은 토요일 저녁인 어젯밤 늦게야 겨우 끝났다. 이제는 10월28일에 잔금을 치르고 집 열쇠를 받는 일만 남았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애초 계획하고 바란 대로 집을 팔고, 또 집을 샀으니 그저 한없이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주택융자금의 노예'로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잠시 잊어버리고, 노쓰밴쿠버에 보금자리를 찾았다는 사실만 떠올리며, 잠시 행복해지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