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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얘기

첫 출근

싱클레어 센터 빌딩. 내 사무실은 이 건물 3층에 자리잡고 있다. 여권 발급 업무를 해주는 캐나다 연방정부 부서도 이곳에 있다. 밴쿠버의 전통 빌딩 중 하나인 싱클레어 센터에는 베르사체 같은 고급 브랜드 상점들이 들어와 있다.


참 곤하게 잤다. 산악 시간대에서 태평양 시간대로 거슬러 올라온 덕택에 한 시간을 벌었지만 심신은 여전히 노곤했고 계속 잠을 불렀다. 5시30분에 알람이 울었다.  


샤워하고, 가능하면 매일 하려고 하는 - 하지만 주말이면 건너뛰곤 하는 - 간단한 코어 트레이닝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사과며 귤, 바나나 따위 스낵을 챙기고, 비는 그쳤지만 혹시나 싶어 우산을 넣고, 밖으로 나오면서 시계를 보니 5시59분이다. 스카이트레인 역까지 나를 데려다줄 버스를 타러 종종 걸음을 친다.  버스역까지 데려다주겠다며 연로한 장인 어른도 길을 나서셨는데, 걸음걸이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6시9분에 지나간다고 - 구글 지도에 따르면 - 돼 있는 버스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에 더 그랬다.


써리와 밴쿠버를 잇는 스카이 트레인에는 '엑스포 라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내가 타는 곳은 마지막에서 두 번째 역인 '써리 센트럴'이다. 이곳에서 사무실 근처 '그랜빌' 역까지는 대략 45분 정도 걸린다.


나와 장인 어른 간의 거리 - 약 10m 정도 - 가 결국 버스를 잡느냐 놓치느냐의 차이로 판명났다. 깜빡깜빡 파란불에서 노란불로, 다시 빨간불로 바뀔 무렵 나는 거리를 가로질러 버스역에 닿았고, 그와 거의 동시에 96번 버스가 간이 정류소 앞에 정차한 것이다. 장인 어른은 교통 신호 하나만큼 뒤에 처져서, 여전히 맞은편 보도에 선 채 나를 찾고 계셨다. 차안에서 손을 흔들었다. 장인 어른도 나를 보았다. 휴, 다행이다.


싱클레어 센터에서 몇백 미터만 걸어나오면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 왼쪽에 정박한 배는 초대형 크루즈다. 오른쪽 크레인들은 대형 화물선들을 정박하기 위한 시설이고, 그 사이로 노쓰밴쿠버와 밴쿠버를 연결하는 '시버스'(Seabus)가 다닌다. 두 도시를 연결하는 다리가 달랑 두 개밖에 없기 때문에 시버스에 대한 직장인들의 의존도는 매우 높다.


바로 이게 시버스다. 승객/직장인들을 밴쿠버에 부려놓고 저 건너 노스밴쿠버로 회선하고 있다. 


시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이 통로를 따라 밴쿠버 다운타운의 직장으로 출근한다.


나를 염려해 주시고 호의를 베풀어 주시는 처가 어른들의 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것이 부담으로 여겨질 때도 많다. 그러지 마시라는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주시기를 바랄 때도 많다.


어제도 그랬다. 공항으로 마중을 나오시지 말라고 그렇게 간곡히 부탁드렸건만 또 굳이 나오셨다. 그것도 장모님까지... 나오시지 말라는 부탁은 연로한 당신들을 염려한 면도 있지만 실은 나 자신의 편의를 고려한 부분이 더 크다. 짐이 많은 것도 아니고, 설령 많다고 해도 들어달라고 부탁할 형편도 못된다. 두 분 모두 팔순이 넘으셨고, 장모께선 무릎까지 좋지 않아서 계단을 잘 오르내리지 못하신다. 그런 처지에, 버스 두 번 갈아타고 전철 타고 해서 한 시간도 넘게 걸리는 그 길을 굳이 오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내는 당신들이 무료하시고 따라서 뭐든 하시고 싶어 그러는 것이니 이해해드리라고 충고하지만 나로서는 쉽지 않다. 그것은 한국의 내 어머니께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당신의 애틋한 마음 씀씀이는 이해하겠으나 그것이 때때로 부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하고 바랄 때가 많은 것이다. 앞으로 한 달여를 처가에서 보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가능한 한 덜 부담스럽게 지낼 수 있을지, 그러면서도 처가와 화평하게 공생할 수 있을지 은근히 걱정된다. 버스 타고, 전철 타고, 꼬박 한 시간 넘게 가고 와야 하는 출퇴근 길도, 익숙해지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릴 듯하다.


첫 출근이라 출입에 필요한 카드가 없다. 아홉 시쯤 로비에서 직속 상사를 만나기로 했다. 그 때까지 시간이 한 시간 남짓 남아 부근을 돌아다녔다. 구름 사이로 떠오르는 아침해도 볼 수 있었다.


캐나다 플레이스 (Canada Place). 여러 대형 행사들이 열리는 컨벤션 센터다. 돛단 배를 형상화한 천막형 건물 디자인이 가장 두드러진다.


저 멀리 보이는 다리는 노쓰밴쿠버와 밴쿠버를 연결하는 두 개의 다리 중 하나인 'Iron Workers Memorial Bridge'다. 다른 하나는 일반에게도 널리 알려진 '라이온스 게이트 다리'다. 


동트는 밴쿠버 앞바다의 풍경. 삭막하면서도 묘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었다.


내 자리에서 밖을 내다보면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 첫 날, 둘째 날, 계속 비가 내렸다. 밴쿠버 지역을 'West Coast'가 아닌 'Wet Coast'라고 부른다는 농담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