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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신성 나카무라 후미노리의 <도둑>


책 제목: The Thief (일어 제목은 '쓰리'(掏摸), 한국 번역서 제목도 쓰리) - 2009년 일본 오에 겐자부로 상 수상작.

지은이: 나카무라 후미노리 (Nakamura Fuminori)
영역: 이즈모 사토코 (Izumo Satoko), 스티븐 코츠 (Stephen Coates)
출판사: 소호 크라임 (Soho Crime)
형식: 하드커버
분량: 220페이지
출간일: 2012년 3월20일

나는 일본 소설을 좋아한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 입문이자 정점이지만 미야베 미유키도 좋았다. 영어권으로 이민 와서 바라는 만큼 많은 일본 책을 접하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일본의 영화, 드라마도 무척 좋아한다. 하지만 책과 비슷한 사정으로, 그저 가끔 목이나 축이는 수준으로 구해 보고 있다.

일본의 소설과 영화/드라마가 매력적인 이유는, 적어도 내 경우, 꼼꼼함과 세밀함 때문이다. 일상의 소소함, 사람들의 이율배반적 속성 (착하면서 악하고, 어리숙하면서 얍삽하고, 약하면서 강하고, 기쁘면서 슬프고...)을 서두르지 않고, 끈기있게, 꾸준히, 마치 현미경을 들이대고 관찰하듯, 그러면서도 대상에 몰입되거나 매몰되지 않은 채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마치 관찰기를 쓰듯 묘사하는 그런 스타일 말이다.

이 책 <The Thief>의 존재는 아마존닷컴을 통해 우연히 알게 됐고, 보자마자 곧바로 새알밭 도서관에 찜해 놓았다. 책이 아직 도착하지도 않은 상태일 때였다 (주문 중). 나카무라 후미노리가 누군지도 몰랐고, 소설 내용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믿는 구석은 있었다. 일단 일본 작가의 작품으로 영어로 옮겨질 정도라면, 게다가 오에 겐자부로 상을 받았다면, 그 재미나 완성도, 혹은 둘 다를 거의 보장할 수 있지 않겠는가. 

줄거리

소설의 제목인 '도둑'은 소매치기이다 (원제목인 <쓰리>에 맞게 <Pickpocketing>이나 <Pickpocket>이라고 할 수도 있었을텐데 <The Thief>라고 한 이유를, 나는 <소매치기>라는 제목이 주인공의 존재감을 지나치게 왜소화한 느낌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정장 차림에 도쿄를 누비며 부유한 사람들만을 노려 감쪽같이 그들의 지갑을 털고, 돈만 꺼낸 다음 지갑은 우체통에 넣는다. 그의 테크닉은 달인의 경지이고, 들키는 법이 없다. 그가 붐비는 인파를 이용하거나, 표적이 다른 데로 주의를 둔 빈틈을 활용해 지갑을 훔쳐내는 과정은 독자로 하여금 긴장과 스릴을 느끼게 한다. 그가 검지와 중지를 이용해 지갑을 빼내는 동작은 상대의 움직임, 주변 정황의 변화를 물결타듯 이용하는 예술가의 그것이다. 

그러나 도둑에게는 미래도, 희망도, 야망도, 욕망도, 사람에 대한 애정도 없다. 단 하나 예외라면 슈퍼에서 그 엄마의 강요로 좀도둑질을 하는 10대 아이에 대한 까닭 모를 연민과 동정이다. 

그런 그의 앞에 과거에 함께 소매치기 작업을 했던 동료 이시카와가 다시 나타나 일감을 제안한다. 위협적이고 위험한 갱이 연루되어 어딘가 불안하긴 하지만 나이든 부자의 집 금고에 든 서류를 빼내오면 되는 간단한 일인 데다, 보수도 만만찮다. 하지만 단순 가택 침입에 절도로 끝날 줄 알았던 사건이 살인 사건으로 발전하고, 이시카와마저 실종돼 버리자 주인공은 도망자의 신세가 된다. 

이제는 안전해졌으리라 생각하며 오랜만에 도쿄로 돌아온 도둑. 그러나 문제의 절도 사건을 의뢰 - 라기보다는 강요-했던 수수께끼의 갱 두목 기자키에게 다시 걸린다. 그에게 새로운 일감을 떠맡기는 기자키.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세 가지 임무를 닷새 안에 끝내지 않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릴 것이라고 위협한다. 이시카와의 사례에서 드러나듯 그의 위협은 결코 허풍이 아니다. 돌연 기자키의 손아귀에 본인의 운명은 물론 동정심을 품었던 10대 소년과 그 어머니의 목숨까지 저당잡힌 도둑. 그의 운명은?

독후감

소설은 짧다. 그저 버스 타고 오가는 동안만 읽었는데도 사나흘 만에 끝냈다. 책 분량은 200페이지가 넘지만 판형도 4X6판 정도로 작고, 글자도 큼직큼직하고, 행간이며 장평도 널찍널찍해서, 조금 과장하면 무협지 읽는 것처럼 금방금방 넘어갔다. 원작의 분량 자체가 얼마 되지 않아, 출판사 쪽에서도 고민께나 했을 것 같다(는 엉뚱한 상상도 했다).

그러나 소설이 훌훌 넘어갔던 것은 그런 외형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야기 자체도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전에 읽은 <금고털이범 (The Lock Artist)>과 마찬가지로 화자가 범인이라는 점이 일단 독특했고, 그러나 한 꺼풀 벗겨 들어가 보면 이 범인/화자 또한 그보다 더 악랄하고 잔인 무도한 사회악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 점을 드러내면서 일본 사회의 뿌리 깊은 병리 현상을 자연스럽게 그린 점도 흥미로웠다.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끄는 작가/철학자 알랭 드 보통의 근간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론 (Religion for Atheist)>에 이런 말이 나온다. '현대 소외의 원인을 더 자세히 캐보면, 우리가 느끼는 외로움의 일부는 어마어마한 인구로 소급된다. 지구에 사는 수십억 인구는 그보다 인구가 훨씬 더 적었을 때보다,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건넨다는 상상을 더욱 위협적으로 만든다. 사회성이나 사교성은 인구 밀도와 반비례의 관계를 갖는 것처럼 보인다.' 이 논리가 일본 도쿄의 번다한 다운타운보다 더 적실하게 통용되는 곳이 또 있을까? 

후미노리의 <도둑>에서, 넘쳐나는 사람들은 그저 서로 무관하고 무관심한 사물이나 다름없다. 죽고 죽이고 뺏고 빼앗지만 사람들은 어제처럼 오늘도 출근하고 일하고 사귀고 술 마시고 섹스 하고 퇴근하고 위협하고 위협받고 살인하고 유기되고 사라지고 잊혀진다. 사람이 많아질수록 고독과 소외의 깊이가 더욱 깊어진다는 점은 비극적인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소설은 광막한 인해(人海)의 도시에서 익명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의 고독한 삶으로 시작하고, 그 끝 또한 그와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이 소설이 기분 좋아지는 동화나 해피엔딩의 환타지가 아닐 것이라는 예상을 먼저 한다면, 첫 한두 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그 결말을 예측할 수 있다. 그 시작과 끝 사이를 이 정도의 다채로운 살과 뼈로 연결한 후미노리의 이야기꾼 솜씨는 감탄할 만하다. 다만 줄거리에서 디테일이 빠져 줄거리 자체가 마치 포스트모던한 메시지처럼 여겨지는 점은 아쉽다. 주인공을 뒤에서 조종하는 악의 세력이 대체 누구인지, 왜 주인공에게 그런 소매치기 임무를 맡겼는지 전혀 설명되지 않은 것도, 소설로서는 작지 않은 결함으로 보인다. 이 정도의 이야기 밀도로 일본 최고의 문학상 중 하나라는 오에 겐자부로 상을 받았다는 게, 독자로서는 다소 뜻밖이다. 신선하지만 작가의 허장성세가 다소 지나치다는 점도 지적해야 하겠다. 젊은 작가의 치기로 봐줄 수도 있겠지만. 별점은 다섯 개 만점에 세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