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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조소프라노 ‘중성소리’에 넋 잃고

[김상현 기자의 클래식 산책]카사로바의 신예답지않는 완숙함 돋보여 | NEWS+ 1997년 10월9일치

모차르트의 걸작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은 결혼을 앞둔 하녀를 범하려다 실패하는 백작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에 등장하는 「케루비노」는 13세의 미소년으로 백작부인을 비롯한 여러 여인과 사랑을 나누면서 오페라에 흥미와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런데 케루비노를 연기하는 사람은 남자가 아니라 남장 여인이다. 이른바 「바지역(役)」(Trouser Role)이다. 바지역을 맡는 성악가의 목소리는 성인 남성의 목소리(하이테너)보다는 높되 여성의 목소리(소프라노)보다는 낮아 야 한다. 대체로 메조 소프라노에 해당하는 목소리다.

요즘 들어 메조 소프라노, 혹은 바지역에 어울리는 목소리들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남자 성악가들의 인기 판도가 테너에서 바리톤으로 내려앉은 것과는 퍽 대조적인 변화다. 메조 소프라노 제니퍼 라모어(텔덱)의 새 음반은 「Call Me Mister」라는 제목 그대로 아예 바지역의 목소리임을 표나게 내세울 정도다.

모차르트의 아리아들을 부른 안네 소피 폰 오터(아르히브)와 베셀리나 카사로바(BMG)도, 그처럼 공표하 지는 않았지만 새 음반들에서 바지역과 잘 어울리는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메조 소프라노들이 새삼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니퍼 라모어의 음반 해설을 쓴 음악평론가 코리 엘리슨은 다음과 같이 매우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

『메조들의 매력적인 양성적 보컬 음역과 그 음색이, 젊음과 노련함, 밝음과 어두움, 생명과 원한의 경계를 도발 적으로 오가기 때문이다. 카르멘 역으로 연인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바로 그 여인들이, 케루비노 역을 맡으면서 이번엔 반대로 여성들의 마 음을 빼앗는 바람둥이로 변신할 수 있는 것이다』

라모어 등 남장여인으로 분한 “바지”역들 이름 날려
 
안네 소피 폰 오터는 체칠리아 바르톨리와 함께, 아마도 가장 높은 평가와 지지를 받는 메조 소프라노일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단단 하게 여문 목소리다. 주정적이기보다 주지적인 느낌이 강해서 독일 가곡에 잘 맞을 듯하다.

예컨대 그녀가 들려주는 「피가로의 결혼」 중 「사랑의 괴로움 그대는 아는가」는 독특한 매력을 주지만 애절한 느낌이나 서정은 상대적으로 적 다. 몇해 전 크게 호평받았던 그리그의 가곡들은 오터의 목소리가 어떤 색깔을 지녔는지 잘 알려주고 있다.

제니퍼 라모어의 음색은 오터나 카사로바에 견줄 때 가장 바지역에 잘 어울리는 것 같다(음반사는 그녀의 이름 「Larmore」를 「라모레」라고 읽었다. 하지만 그녀가 미국 국적임을 고려하면 「라모어」가 더 타당한 발음 같다). 그녀는 「Call Me Mister」에서 참으로 멋진 목소리를 들려준다.

18세기 전까지 이 역을 맡았던 거세 가수들, 이른바 「카스트라토」의 그것과 흡사한 음색이다. 글룩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중 「에우리디체를 잃고 어떻게 살아가나」, 로시니의 「탄크레디」 중 「엄청난 불안과 고민 끝 에」 같은 곡이 특히 그러한 경우.

라모어는 유독 바지역과 인연이 많다. 1986년 모차르트의 「티토 황제의 자비」로 세계 무대에 데뷔할 때 그녀가 맡은 역할도 바지역인 섹스투스였다. 이후 그녀를 세계적인 성악가로 부각시킨 배역도 대부분 바지역이었다.

베셀리나 카사로바는 지난해 「포트레이트」라는 음반 한장으로 그야말로 혜성처럼 떠올랐다. 당당하고 힘찬 목소리, 풍부하고 유려한 표현력, 현란한 콜로라투라적 기교 등으로 카사로바는 순식간에 정상급 성악가로 발돋움했다. 이번에 선보인 「모차르트 아리아」 음반은 카사로바가 왜 그처럼 격찬받고 있는지 잘 설명해 준다.

그녀는 메조 소프라노면서도 부드럽거나 가볍기보다 강한 힘을 지니고 있어서 관능적인 느낌을 준다. 고음과 저음의 대비가 극적이면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을 보여주며, 뛰어난 표현력과 연기력으로 바지역의 매력을 잘 드러 내는 데도 성공하고 있다.

「피가로의 결혼」 중 「난 알지 못하네」「티토왕의 자비」중 비텔리아역(이미 꽃의 유대는 맺어지지 않아) 같은 곡은 카사로바의 신예답지 않은 완숙함과 독특한 매력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노래들이다.

남성-여성의 대비가 모호해지고 동성애까지도 용인되는 현대 사회. 우리 시대의 성의 굴절이 이들 바지역의 인기를 더욱 확고히하는 쪽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이러니로 여겨진다. 김 상 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