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술과 이성

캐나다 방송 언론의 생존 전략 '캔콘’을 아십니까?

매년 초면 북미 시장은 미국 프로 미식축구 (NFL)의 최종 챔피언전인 슈퍼보울 (Super Bowl)에 대한 기대감으로 잔뜩 달아 오른다. 비단 어느 팀이 우승할지에 대한 관심 때문만이 아니다. 슈퍼보울의 TV 중계 중에 처음 선보일 광고의 내용과 광고사들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기도 하다. 예컨대 여섯 살짜리 꼬마 아이가 다스베이더로 분장한 폴크스바겐 광고는 TV에서뿐 아니라 유튜브를 통해서도 엄청난 관심과 인기를 모았다.


슈퍼보울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캐나다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맥주 판매량이 돌연 급증하고, 술집은 경기 생중계를 보려는 사람들로 가득차고, 경기 중에는 거리조차 한산해 진다. 하지만 미국 TV의 중계와 캐나다 TV의 중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경기 자체만 같을 뿐 그 사이사이에 나오는 광고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여러 신문과 방송을 통해 미리부터 소개되어 시청자들의 기대와 호기심을 잔뜩 자극했던 그 광고는 캐나다에서 볼 수 없다. 캐나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이미 수없이 나온, 새로울 것 없는 캐나다 회사들의 광고뿐이다.

왜 그럴까? 캐나다 방송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이른바 ‘캐나다산 콘텐트’ (Canadian Content), 혹은 ‘캔콘’ (Cancon) 때문이다. 멕시코의 유명 휴양지 ‘캔쿤’이나, 한국의 인기 프로그램을 줄인 ‘개콘’을 연상시키지만 비슷한 발음 외에는 전혀 공통점이 없다. 그 규칙 덕택에 캐나다의 방송 언론은 프로그램 자체는 미국에서 고스란히 가져오면서도, 광고는 캐나다 것으로 채워넣을 수 있는 것이다. 시청자 입장에서는, 특히 슈퍼보울 시즌에 등장하는 새 광고에 열광하는 경우에는 캔콘 규칙이 원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광고까지 고스란히 들여오게 허용할 경우, 캐나다 방송 언론으로서는 단 한 푼의 광고 매출도 못 올리는 사태를 겪을 수 있다. 미국에서 송출되는 광고를 캐나다에 내보내는 대가를 받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그건 캐나다와 미국의 문화 차이, 제도 차이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캐나다에도 엄연히 심의기구가 있고, 따라서 결국 미국 광고를 고스란히 캐나다에 내보낼 수 있게 되더라도 그 전에 적절한 심의 절차를 거쳐야 하며, 거기에는 시간이 걸린다. 슈퍼보울 경기는 생중계할 수 있어도 광고는 그럴 수 없는 속사정이다.

한국이나 다른 나라의 방송 언론에 견주어 캐나다의 라디오와 TV는 미국의 직접적 영향력을 더욱 절실하게 깨달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라디오와 TV의 프로그램 편성에 ‘미국산’이 다량 끼어들 수밖에 없고, 따라서 미국 문화는 거의 실시간으로 캐나다에 전파되고 스며든다. 방송 언론 입장에서는 이들 프로그램이 높은 인기를 누릴수록 좋지만, 그를 감독하고 규제하는 캐나다 정부 입장에서는 어떻게 ‘캐나다의 미국화’ 흐름에 적절히 브레이크를 걸면서, 캐나다만이 지닌 독특한 문화적 동질성을 유지하고 발양할 것인가가 큰 골칫거리일 수밖에 없다.

콘텐트, 혹은 개별적 프로그램만이 문제가 아니다. 방송사 자체의 소유권도 큰 도전으로 여겨진다. 일단 자본력에서 캐나다의 방송사들이 미국의 거대 방송사들을 대적할 도리가 없고, 그 때문에 미국의 거대 복합자본에 쉽사리 흡수될 위험성이 있다. 결국 캐나다의 방송 지형에서 늘 중대 현안으로 부각되는 것은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양쪽에 걸쳐 있다: 첫째, 화려하고 흥미진진한 미국산 프로그램들의 융단 폭격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캐나다만의 특질을 보여주는 ‘캐나다산 프로그램’을 계속해서 만들고, 홍보하고, 방송할 것인가. 둘째, 어떻게 하면 미국을 비롯한 해외 대자본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견제하면서 ‘캐나다산’ 방송사들의 생존 – ‘흥성’은 그만두고라도 – 을 보장할 것인가.

그러한 물음에 가장 가깝게 자리잡은 캐나다의 관련 기구, 다시 말해 캐나다판 ‘방송위원회’는 ‘캐나다 라디오-텔레비전 및 전기통신 위원회’(Canadian Radio-television and Telecommunications Commission, 이하 ‘CRTC’)이다. 그리고 CRTC가 내놓은 캐나다 방송언론의 한 활로는 ‘캐나다산 콘텐트’ (Canadian Content) 규칙이다.  


흔히 ‘캔콘’(Cancon)으로 불리는 이 규칙은 라디오, TV, 그리고 전문화된 방송 채널에 적용되는데, 그 내용은 M A P L이라는 넉 자로 요약된다. 캔콘을 ‘MAPL 시스템’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MAPL은 CRTC가 정한 네 가지 규칙이다. 라디오의 프로그램에 이 규칙을 정해 보면 이런 양상이 된다.
 

  • M (Music) – 전적으로 캐나다인이 작곡한 음악일 것.
  • A (Artist) – 음악과 가사 (또는 음악이나 가사중 어느 하나)가 주로 캐나다인에 의해 연주되었을 것.
  • P (Production) – 실황으로 된 음악이 (1) 전적으로 캐나다에서 녹음되었거나, (2) 전적으로 캐나다에서 공연되어 캐나다에서 실황으로 방송될 것.
  • L (Lyrics) – 전적으로 캐나다인이 작사했을 것.

상업용 라디오 방송 정책에 따르면 모든 AM과 FM 방송국에서 매주 방송되는 모든 음악의 35%가 캐나다산이어야 한다. 그뿐 아니라 그 35%의 음악은 주중 오전 6시~오후 6시에 방송되어야 한다. 한편 TV는 1년 단위로 계산해 전체 방송분의 최소한 60%를 캐나다산으로 내보내야 하며, 적어도 50%를 오후 6시~자정 시간대에 방송해야 한다. 캐나다 공영 방송인 CBC의 경우 오전 6시~자정 시간대에 최소한 60%의 캐나다산 프로그램을 내보내야 한다.


캐나다는 미국과 이웃하고 있다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방송을 규제하는 관행과 방향이 사뭇 독특하다. 그 관행과 방향은, 이웃나라 미국의 문화적 영향력과 시장 지배력이 압도적이라는 불가피한 현실과 맞물려 있다. 그 현실은 미국 문화의 무차별적 유입과 그에 따른 문화의 ‘미국화’ 현상을 막아야 한다는 사회문화적 필요성뿐 아니라, 미국의 자본력에 비해 영세하기 짝이 없는 캐나다의 방송사들이 생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장 조건을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경제적 요구도 제기한다. 캐나다의 채널을 통해 미국 프로그램을 내보낼 때에도 그 사이사이에 들어가는 광고 방송은 무조건 캐나다 것이어야 한다는 요구조건도, 영세한 캐나다 방송국들의 광고 수입을 보장해주기 위한 고육책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캐나다의 방어선은 점점 더 미약해지는 느낌이다. 그 가장 큰 원인은 물론 인터넷이지만, 주소지를 미국인 것처럼 꾸며 - 미국에 친구나 친척만 있으면 주소지를 미국으로 내는 것은 일도 아니다 - 미국의 위성TV 서비스를, 캐나다측 서비스의 선별 기능 없이 고스란히 받아보는 사람이 날로 느는 것도 한 원인이다. 특히 미국과 접경한 지역의 위성TV 관련 암시장은 만만찮은 시장 규모를 자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캐나다에서 활동하는 방송 언론에 대한 해외 자본의 지분 제한도, 시대에 걸맞지 않는다는 거센 비판에 직면해 있어서 그것이 풀리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설령 그런 규제가 예상보다 더디게 풀린다고 하더라도 캐나다에 법인을 세워 그로 하여금 방송이나 통신 사업을 하게 하는 편법이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에, 규제의 실효성 자체도 의문을 사고 있다. 해외 자본이 캐나다에 더 많이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규제 때문이 아니라 캐나다 방송 시장의 규모 자체가 작아 덜 매력적이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CRTC가 들고 있는 방송 정책의 두 근간, 곧 ‘캐나다 콘텐트 규칙’과 ‘캐나다 방송국에 대한 해외 자본의 소유권 제한’은 미국을 필두로 한 해외 거대 미디어의 공세를 막기 위한 힘겨운 방패이자, 캐나다 문화의 생존을 담보하는 한 보루이다. 미디어 시장의 급속한 재편과 진화에, CRTC와 캔콘 정책이 앞으로 얼마나 더 유연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