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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집행인의 딸' 시리즈

독일 알프스 산맥 부근의 바바리아 지방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 숀가우. 


그 마을 ‘사형집행인의 딸’인 막달레나는 시대를 잘못 타고 났다. 명민하고 독립심 강하고 고집 세고 아름답지만 당대 계급 사회의 맨 밑바닥에서 천대받고 무시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결혼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당대의 관습상 다른 사형집행인의 아들과만 중매될 수밖에 없는 처지다. 하지만 막달레나는 마을의 젊은 의사인 지몬 프론비저와 사랑에 빠진 사이이다. 


사회의 최하층민으로 다른 사람들이 길에서 마주치기조차 꺼려 하는 사형집행인의 딸이 사회의 중간 계급과 결혼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의 홀아버지 보니파즈 또한 '돌팔이의사'로 마을 사람들에게 멸시 받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사형집행인과는 비교가 안되는 지위이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보니파즈는 사형집행인 주제에 종종 의사 노릇을 자처하며 자신의 일감을 빼앗는 야콥 퀴슬에게 강한 멸시와 적개심을 품고 있다. 그러니 막달레나와 지몬이 맺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하지만 개명한 아버지 퀴슬은 그런 사정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딸의 로맨스를 용인한다.


하지만 ‘사형집행인의 딸’이라는 제목과 달리 실상 이 소설의 주인공은 막달레나가 아니라 야콥 퀴슬이다. 온갖 약초에 달통하고, 당대의 여러 의학 기술과 이론에도 밝은 퀴슬은 전장에서 겪은 온갖 잔혹한 체험과 고통을 뒤로 하고 고향인 숀가우로 돌아와 불운했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다시 사형집행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비록 지체는 최하층민이지만 의학 기술과 세상을 읽는 지혜에 관한 한 마을의 어떤 상류 계급이나 지식인보다 더 개명한 인물이다. 또 고통 받고 천대 받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이 깊어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도와주는 데도 주저하지 않는다. 지몬은 그런 퀴슬의 열린 마음과 지혜에 반해서, 또 퀴슬이 소장한 여러 최신 의학서를 읽어 볼 생각에, 하지만 무엇보다 막달레나를 만날 심산으로, 퀴슬 가족을 경원시하는 아버지의 맹렬한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퀴슬의 집을 자주 찾는다. 퀴슬도 그런 지몬을 아끼면서 그에게 자신의 노하우와 지혜를 아낌없이 전수한다.


1659년의 어느날 온몸에 끔찍한 상처를 입고 익사한 열두 살 소년의 시체가 발견된다. 문제는 그의 어깨에 '마녀의 표식'으로 여겨지는 작은 문신이 발견된 것. 그 아버지는 마을의 산파인 마르타 스테클린이 마녀라며 그녀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돌연 피냄새를 맡은 마을 사람들은 마녀를 처단해야 한다며 그녀의 집으로 몰려간다. 숱한 전쟁에 참전해 온갖 못볼 꼴을 보고, 스스로 그런 참상의 중심에 서기도 했던 전직 군인으로 싸움에 이골이 난 거한 퀴슬이 중간에 나서서 막지 않았다면 마르타는 폭도들의 손에 속절없이 목숨을 잃었을 게 분명했다. 마르타는 스스로를 변호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감옥에 갇힌다. 


마을의 행정관은 마르타가 범인이 아님을 뻔히 알면서도 마을의 평화를 위해서는 그녀로부터 마녀 자백을 받아낸 뒤 화형시키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판단한다. 그리고 그런 고백을 끌어내기 위해 퀴슬에게 마르타를 고문하라고 명령한다. 화형은 본인이 마녀라고 자백하고, 그 자백 사실을 문서로 기록한 뒤에만 가능하다. 퀴슬과 지몬은 마르타의 무죄를 확신하지만 이를 증명할 시간이 없다. 마을 사람들은 뭔가 불길해 보이는 일이 일어나기만 하면 이를 무작정 마녀 탓으로 돌린다. 심지어 마르타가 감옥에 갇힌 뒤에 두 어린이가 더 살해되었는데도 마을 사람들은 마르타의 결백을 인정하기는커녕 도리어 마르타가 감옥 안에서 마귀를 조종해 범행을 저지른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면서도, 그런 능력을 가진 마르타가 왜 스스로 도망치지 않았느냐는 물음에는 누구도 뚜렷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소설은 약 일주일 동안 벌어진 상황을 묘사하는 형식이다. 무고하게 마녀로 몰려 화형될 위기에 처한 여자를 구하고, 실제로 살인을 저지른 범인을 찾기 위해 시간과 경쟁하며 동분서주하는 퀴슬과 지몬, 막달레나의 노력이 소설의 핵심이다. 그러나 세 사람의 진실 찾기, 혹은 범인 찾기는 곳곳에서 장애물을 만난다. 촉박한 시간이 그 하나이고, 사회의 최하층민으로 홀대받다 보니 필요한 정보를 제대로 얻을 수 없는 처지가 그 하나이며, 사형집행인과 그 딸 또한 마녀와 연루되어 있을 거라는 마을 사람들의 근거 없는 의혹과 무지몽매가 또 하나다. 마르타가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가능한 한 조용히, 자기 체면과 위신을 살리면서 서둘러 사건을 무마해 버릴 목적으로 진실을 애써 외면하는 마을 행정관의 직무 유기와 교활한 정치 술수가 그 하나이며, 마녀 재판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안위를 꾀하려는 마을 사람들의 냉혹하고 잔인한 집단 이기주의가 또 하나이다.


소설은 놀랍도록 흥미롭고 스릴에 넘친다. 흔히 ‘암흑시대’와 ‘마녀 재판’으로 특징 지워지는 중세 시대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시대적 배경은, 한편으로는 무지와 미신으로 점철된 당대 사회상을 주인공들이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장벽으로 작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법과 판타지의 낭만성을 안겨주는 중세 시대의 매력을 유지시켜 주는 틀로 작용한다. 당대 시골 사람들의 단순하면서도 곤고한 삶의 양상이 시각적으로 잘 묘사되어 사실성이 높다는 점, 무지막지한 사회의 편견과 홀대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품위와 가치, 유머를 잃지 않는 주인공 퀴슬의 언행, 지몬과 막달레나의 계급을 초월한 로맨스 등도 더없이 인상적이다. 중반에서 긴장감이 다소 느슨해지고 중언부언하는 듯한 느낌도 없지 않지만 전체적인 흥미와 완성도를 훼손할 정도는 결코 아니다. 


'사형집행인의 딸'은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의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거기에 표현된 각계 각층 사람들의 복잡다단한 관계, 언행, 음모 등은 결코 그 시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당시 주민들의 무지와 미신을 빌려 지은이가 종종 보여주곤 하는, 군중, 혹은 우중의 비극은 그저 먼 과거, 먼 나라의 지나버린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이 불우한 격변과 갈등의 시대를 에둘러 표현한 우화처럼 읽힌다. 


아침에 사형집행인을 마주치면 재수없다며 애써 피하거나, 어쩔 수 없이 마주치고 나면 침을 퉤 뱉으며 제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라는 주문을 외는 정도는 그렇다 치고, 한두 가지 말도 안되는 꼬투리를 가지고 애꿎은 산파를 마녀로 낙인 찍고, 사형집행인의 딸을 천민이라며 무시하고 멸시하는 주민들의 태도는, 한편으로는 역겹고 분개스러우면서도, 과연 저런 일이 지금은 벌어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회의를 품게 된다. 힘센 자의 위세에 눌려 자신의 생각조차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고 이리 저리 가축처럼 내몰리면서, 자기 앞의 티끌만한 이익을 좇아 다른 무고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몰고, 힘센 자의 몽둥이를 추종하고 맹목적 폭력에 탐닉하는 군중의 행태는 '사형집행인의 딸' 시리즈에서 일관되게 표현되는 내용이자, 그래 군중은 정말 우중이야, 하고 공감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대목이다. 시대적 배경이 17세기 중반이기 때문이라고만 하기에는, 21세기의 군중 또한 별로 나아진 게 없다는 생각 때문에 영 입맛이 쓰다. 


‘사형집행인의 딸’은 아마존닷컴의 자체 출판 부서인 '아마존 크로싱'에서 발굴해 히트 시킨 소설이다. 아마존닷컴이 아니었다면 묻혀 버렸을 '보석'이다. 독일에서 처음 출간되었을 때는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다가 아마존 크로싱에 스카웃되면서, 그리고 리 채디에인(Lee Chadeayne)이라는 걸출한 영어 번역가를 만나면서 날개를 달았다. 2013년 7월 아마존에서 자체 출판한 책으로는 처음으로 판매고 1백만 부를 돌파하는 기록도 세웠다. 종이책보다 킨들용 전자책으로 먼저 알려져서 전자책 판매고가 더 높았다는 진기록도 남겼다. 


‘사형집행인의 딸’은 이 밖에도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숨기고 있다. 그것은 주인공 야콥 퀴슬이 실존 인물이었고, 직업도 정말로 ‘사형집행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소설의 지은이 올리버 푀치가 퀴슬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푀치는 자신의 족보를 꼼꼼히 연구하고 추적한 끝에 독일 바바리아 지방 숀가우에 살며 10년 남짓 사형 집행인 노릇을 했던 퀴슬을 만났고, 그러한 그의 삶에 자신의 소설적 상상력을 붙여 이처럼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직조해 냈다. 


위키피디아의 ‘사형집행인’ 명단 (http://en.wikipedia.org/wiki/List_of_executioners)을 보면 퀴슬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은 모두 10명이고, 이 중 여섯 명이 숀가우의 사형집행인이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과 정확히 일치하는 인물은 없다. 작가적 상상력이 작용한 대목이다. ‘사형집행인의 딸’은 허구와 사실의 적절한 배합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가외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를테면 퀴슬 집안의 마지막 사형집행인으로 여겨지는 인물은 1800년대의 요한 미카엘 퀴슬인데, 그 이후의 퀴슬 집안은 어떤 일을 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또 푀치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현지를 꼼꼼히 답사하고, 당시의 수많은 기록을 참고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17세기의 시대 상황, 당시 주민들의 삶 등이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표현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사형집행인의 딸’은 모두 4권으로 구성된 시리즈의 시작이다. ‘수도승의 음모’ (Dark Monk), ‘거지들의 왕’ (The Beggar King), 그리고 ‘위험한 순례’ (The Poisoned Pilgrim)로 이어지는 시리즈는 야콥과 막달레나, 지몬 ‘팀’의 흥미진진한 모험을 보여주면서, 막달레나와 지몬의 굴곡 많은 사랑 이야기도 더욱 맛깔스럽게 그린다. 모쪼록 ‘사형집행인의 딸’이 독자들의 좋은 반응을 얻어서 나머지 시리즈도 모두 국내에 소개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 블로그를 통해 여러 번 이 책을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