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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을 요약하는 10개의 단어

한 해가 마무리 될 때마다 곳곳에서 정리와 회고, 결산이 이루어진다. 그 중에서 내가 특히 관심을 갖는 것은 언어의 변화, 혹은 진화이다. ‘올해의 단어’, 널리 통용된다고 인정해 사전에 정식으로 등재한 ‘올해의 신조어들’ 같은 코너는 그런 풍경을 요약해 보여준다. 지난 한 해, 세계가 – 아니면 적어도 영어권 사회가 – 어떤 단어나 단어들로 묘사되고 특징 지워질 수 있는가 간접적으로 드러내준다.


미국에서 손꼽히는 사전 출판사 ‘메리엄-웹스터’ (이하 ‘M-W’)가 뽑은 올해의 단어는 ‘문화’를 뜻하는 ‘Culture’이다. 신조어가 아니라는 점도 퍽 놀랍고, 온라인과 인터넷, 신기술의 세계와 다소 거리감을 보인다는 점도 뜻밖이다. 신선하기도 하다. (지난해에는 Dictionary.com이 뽑은 올해의 단어 '프라이버시'(Privacy)에 대해 블로그 포스팅을 한 바 있다.)


1. 문화 (Culture)

M-W가 ‘올해의 단어’를 뽑는 기준은 그 단어의 이용 빈도가 과거와 비교해 얼마나 더 늘었느냐 하는 것이다. M-W에 따르면 ‘문화’가 그 중 가장 돋보였다. 보통 새 학기가 시작될 때 자주 쓰이는 이 단어는 올해 들어 사회 전반에서 널리 쓰였다. 이를테면 ‘투명성의 문화’ (culture of transparency), ‘소비자 문화’ (consumer culture), ‘유명인 문화’ (celebrity culture, 유명인들의 일반 행태를 뜻할 듯하다), ‘승리하는 문화’(winning culture, 경쟁에선 늘 이겨야 한다는 인식이나 태도를 뜻하겠지) 등과 같이 예전보다 폭넓게 적용되거나, ‘시험 준비 문화’ (test-prep culture), ‘행군 악대 같은 문화’ (marching band culture)처럼 구체적인 수식어와 함께 쓰였다. 


2. 노스탤지어 (Nostalgia)

올해 미국의 대중문화를 특징 짓는 단어 중 하나일 것이다. TV드라마 ‘매드 멘’은 1960년대의 광고 회사와 비즈니스 행태를 충실히 재현해 큰 인기를 모았다. 그보다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미국 금주법 시행 시대(1920년~1933년의 아틀란틱 시티를 무대로 한 드라마 ‘보드워크 제국’이나, 20세기 초반 영국 요크셔의 가상 장원 ‘다운튼 애비’를 무대로 한 동명의 드라마도 마찬가지 흐름이다. 옛 소련의 영화를 꿈꾸며 무력 침공도 마다 않는 푸틴의 크리미아 복속도 따지고 보면 노스탤지어와 연관된다.  M-W에 따르면 이 단어를 찾은 횟수는 작년보다 두 배나 늘었다. 노스탤지어라는 단어는 ‘귀향’을 뜻하는 그리스 말에서 유래했는데, 본래 의미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병’이란다. 


3. 서서히/은밀히 퍼지는 (insidious)

이 단어가 3위에까지 오르게 된 배경은 크게 세 가지라고 M-W는 설명한다. 하나는 공포 영화 ‘인시디어스’ 3편이 내년 4월에 개봉될 것이라는 발표가 나오면서 대중의 호기심을 촉발한 때문이다 (아무튼 북미 사람들의 공포 영화 사랑은 집착이나 광기에 가깝다고 여겨질 때가 많다). 다른 하나는 올해도 어김없이 기승을 무린 맬웨어의 작동 행태를 ‘insidious’로 표현한 언론 때문이다. 세 번째,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배경은 미국의 첫 에볼라 감염 환자로 기록된 토마스 에릭 던컨의 죽음 직후 “던컨 씨는 은밀히 퍼지는 질병인 에볼라에 희생되었습니다” (Mr. Duncan succumbed to an insidious disease, Ebola)라고 표현한 병원측 대변인의 발표이다. 이 단어 ‘insidious’의 의학적 정의는 더 구체적이라고 M-W는 설명한다. ‘워낙 서서히 진행되어 그 증세가 분명히 드러나기 전에 확고하게 정착되는’. 이 단어는 ‘매복’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나왔다.


4. 유산 (Legacy)

유명 정치인이나 연예인, 스포츠맨이 은퇴하거나 사망하면 ‘유산’(legacy)이 언급된다. Legacy는 재산이나 물질적인 무엇을 뜻하기보다 무형의 자산, 문화, 경향 등을 지칭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으로 미국은 물론 세계 경제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벤 버냉키가 8년 만에 물러났고, 영원한 양키 데릭 지터가 20시즌 만에 뉴욕 양키스에서 은퇴했으며, 세계 제1차 대전 개전 100주년을 맞아 대전의 유산(영향)에 대한 논의가 벌어졌고, 인종 피부색 종교 출신국에 따른 차별을 철폐할 목적으로 제정된 연방 공민법 50주년을 맞아 미국의 현주소를 따지는 토론이 진행되었다. 닉슨을 하야시킨 워터게이트 스캔들 40주년도 ‘legacy’라는 단어의 이용도를 높인 한 요인이었다.


5. 페미니즘 (Feminism)

미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2014년 내내 자주 쓰인 단어였다. 비디오 게임 산업에서 차지하는 여성의 지위에 대한 논의가 촉발되었고, 시사주간지 타임은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비욘세, 마일리 사이러스, 패럴 윌리엄스 등을 포함시키면서, 2014년은 ‘팝 페미니즘의 해’였다고 선언해 많은 이들이 새삼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찾아보게 만들었다. 또 캘리포니아대 산타 바버라에서 벌어진 총격 사건 직후 여성 혐오 선언문이 발견되면서 여성 혐오증(misogyny)와 더불어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졌다. 



6. 뭐라 말할 수 없이 좋은 것 (Je ne sais quoi)

미국의 한 TV 광고에서 두 남자가 ‘치킨 윙’을 먹다가 한 남자가 더없이 맛있는 그 윙들이 여성들과의 데이트에서 자신의 새로운 ‘윙맨’(호위기, 호위 무사) 노릇을 하며 자신을 거부할 수 없이 매력적인 남자로 만들 거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기막히게 맛있는 (delicious) 치킨 윙이 자신도 그처럼 여성들에게 'delicious'한 남자로 만들어줄 거라는, 실은 터무니없은, 바람이다). 하지만 사뭇 회의적인 친구는 이렇게 대꾸한다. “오 그래, 이 윙들이 잘도 너를 ‘형언할 수 없이 멋진 남자’(je ne sai quoi)로 만들어주겠다?” (Oh, right, gonna give you that certain je ne sais quoi?


그러자 처음 남자가 되묻는다. “제나가 뭐랬다고?” (Jenna said what?)


Je ne sais quoi’는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좋은 것, 혹은 품질’을 뜻한다. 불어로는 말 그대로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라는 뜻이다. 영어에서는 명사로 쓰이고, 종종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현학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쓴다.


7. 혁신 (Innovation)

새로울 게 없는 단어. 사실은 남용되어 그 본 뜻이 퍽이나 훼손된 단어. 영어 사전에서 이 단어를 찾은 사람이 유독 늘어난 까닭으로 M-W가 제시한 사례는, ‘혁신가의 딜레마’의 저자로 유명한 클레이튼 크리스텐슨에 대해, 유수의 문화 주간지 뉴요커의 정규 필진이자 하버드 대 교수인 질 르포어 (Jill Lepore)가 비판적인 글을 쓴 것. 애플의 스티브 잡스 평전으로 유명한 월터 아이작슨은 ‘혁신가들’(The Innovators)이라는 신작에서 혁신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분석했다. 


8. 은밀한 (Surreptitious)

이 단어가 자연스레 떠올리는 연관어는 감시(surveillance)이다. 사상 유례 없이 많은 양의 정보가 공개되고 공유되지만, 그와 동시에 은밀하고 사적인 감시, 도청, 정보 도용도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더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진행된다. 에드워드 스노우든의 용감한 폭로로 만천하에 알려진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은밀한 정보 수집 규모는 1984를 쓴 조지 오웰조차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게 할 정도로 막대하고 전방위적이다. 타겟과 홈 디포 같은 대규모 소매점들의 신용카드 정보 유출 사고도 온라인 디지털 세계의 은밀성, 그것이 지닌 무서움을 새삼 상기시킨다. 게다가 올해는 닉슨에게 영원한 오명을 안겨준 ‘워터게이트’ 도청 스캔들이 일어난 지 4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은밀한’이라는 단어가 인기를 누리게 된 한 원인이었음은 물론이다. 


9. 자율성 (Autonomy)

정치적 자율성 (political autonomy)는 영어권 나라들에서 작지 않은 화제이자 화두였다. 영국에서 독립하려던 스코틀랜드가 그랬고, 전쟁 직전까지 치달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갈등이 또한 그랬다. 그러나 ‘자율성’이라는 단어가 가장 널리 회자된 계기는 올해 가을, 민주화와 자유 선거를 주장하는 홍콩 거주민들의 대규모 시위였다. 


10. 질병률 (Morbidity)

이 단어의 이용 빈도는 지난 9월에 치솟았다. 에볼라 바이러스에 대한 관심과 불안감 때문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또 한 이유로 이 단어가 사망률을 뜻하는 ‘Mortality’와 헷갈렸기 때문이라는 M-W의 추정이다. ‘Morbidity’는 ‘질병’을 뜻하는 라틴어 ‘morbus’에서 나왔고, 뜻도 ‘질병의 상대적 발병률’(relative incidence of disease)이다. 그에 비해 ‘Mortality’는 ‘죽음’을  뜻하는 라틴어 ‘mors’에 뿌리를 둔 단어로 ‘주어진 시간이나 장소의 사망자 숫자’(the number of deaths in a given time or place)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