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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얘기

떠나는 사람들, 혹은 떠나게 하는 회사


이젠 가을 햇살

한낮의 햇살이 어느새 다시 반갑고 살갑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땡볕이 짜증스럽고 견디기 어려워 나무나 건물의 그늘만 찾아 걷던 게 불과 몇 주 전인데, 어느새 그 ‘한여름’이 지나간 게다. ‘8월 염천’이라는 표현을 쓰기가 민망한 밴쿠버지만, 직사 광선의 따가움이 불편하고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점심 시간의 산보는 늘 그늘이 잘 형성된 트레일로만 다니는 것으로 굳어졌었다. 그 시간의 정규 프로그램인 달리기도 새벽 시간대로 옮겨진 지 오래였다.


새벽 달리기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달리기 시작한 게 언제였더라? 가민 커넥트(Garmin Connect)의 기록을 보니 7월8일부터다. 이제 두 달 남짓 된 셈이다. 그 사이에 낮의 길이는 점점 더 짧아지는 대신 밤의 길이는 점점 더 길어졌다. 이제는 달리기를 마치고 6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와도 아직 사방이 어둑신하다. 해 뜨는 시간이 6시40분 이후이니 당연히 그럴 만도 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새벽달이 부족한 대로 트레일을 밝혀준다는 점이다 (아래 사진은 새벽 5시쯤 찍은 것). 그런 계절의 변화를 고려하면, 다시 점심 달리기로 복귀를 해야 할 날이 멀지 않은 셈인데 (아니, 벌써 복귀했어야 하나?), 그래도 지금 목표는 10월12일 빅토리아 마라톤 때까지만 아침 달리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떠나는 사람들, 혹은 떠나게 하는 회사

한 달쯤 전, 나와 같은 날 입사했던 IT보안 관리자 J가 떠났다. 부인의 개인 비즈니스가 워낙 잘돼서 그걸 도와줘야 한다는 이유. 그리고 이 달(9월) 말에는 내 직속 상관 M이 다른 회사로 이직한다. 또 다음 달(10월)에는 나를 뽑았던 또 다른 상관 D마저 회사를 그만둔다 (입사 당시에는 D가 내 직속 상관이었지만, 조직 구성이 바뀌면서 M으로 바뀌었다. 둘 다 내게는 더없이 훌륭한 상사들이었다).


J의 경우를 예외로 친다면, M과 D의 주된 사직 이유는 공통적으로 가정과 일 간의 균형을 잃어서, 그것을 되찾고 싶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보기 어렵지만 여기에서는 자주 보게 되는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라는 이야기다. 이들의 업무량은 한 마디로 ‘너무 벅찼다’. 아웃룩 캘린더에서 이들과의 미팅 시간을 찾아내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직접 사무실 문을 노크하고 들어가 언제 시간을 낼 수 있느냐고 물어야 할 때가 몇 번 있었다. 두세 개의 미팅이 같은 시간대에 겹치는 일도 잦았다. M의 경우는 게다가 다른 부서의 VP 때문에 가외의 스트레스까지 받았다. 그 부서의 프로젝트를 M이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사표를 냈다. D에게는 어린 딸이 둘 있는데, 그 중 막내는 아직 한 살도 안됐다. 그런데 워낙 잦은 출장으로 아이 커가는 모습을 못 보는 경우가 많다며 슬픈 표정을 짓곤 했었다. 결국 이 친구도 사표를 던졌다. 


M의 사직도 아쉽지만, 내게는 D의 사직이 더 안타깝다. 한국계 캐나다인인 D는 한국말은 거의 못하지만 알아듣기는 잘한다. 그 부모가 이민자인 까닭이다. 윗사람을 공경하고 다른 사람에게 친절한 한국인의 장점과,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캐나다인의 장점을 고루 갖춘, 참 좋은 상사였다. 나를 뽑을 때, 급여 조건부터 이사 비용 지원에 이르기까지, 내가 참 까탈스럽게 굴었는데도 화 한 번 내지 않고 열심히 도와주었다. 나는 직장을 다니면서 차차 D를 알아가는 가운데, 상사-부하의 관계를 넘어 친구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이뤄질 수 없게 됐다. 사실 내가 이 회사에서 일하는 지난 1년 가까운 기간 동안, D를 사무실에서 본 날이 며칠이 안된다. 늘 밖으로만 도는 업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대로 사적인 대화 한 번 나누기가 어려웠다. 


내 직장은 이제 막 출범해 정신없이 커가는 중이다. 그 때문에 조직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채 덩치만 커져 여기저기 허점도 많고 흠결도 많다. 그래서 이곳의 표현에 따르면 말 앞에 마차를 세우는 (cart before horse) 식의, 앞뒤 안맞는 결정이나, 준비가 제대로 안된 상태로 일을 밀어부치는  경우도 많다. 어느 한두 사람의 영웅적인 노력과 희생으로 겨우 꾸려가는 부분이 적지 않지만, 이런 행태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M과 D는 그런 성장통과, 별로 인간적이지 못한 상급자들과의 매끄럽지 못한 관계가 빚은 희생양으로 비친다. 나는 프라이버시라는 특수하고 전문적인 분야를 담당한 덕택에 그런 업무 부담으로부터는 자유로운 편이지만, 뒤숭숭한 회사 분위기로부터는 그렇지 못하다. 회사의 분위기와 역학 관계는 또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지, M과 D를 대신하는 사람들은 또 어떤 부류일지 기대 반, 걱정 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