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는 얘기

새알밭을 뜨다

무슨 호텔의 조명이 온통 핑크빛이냐며 비웃었던 바로 그곳에서 하루를 묵었다. 새알밭에 살면서 새알밭의 호텔에 묵을 일이 있을까 했는데, 결국 있었다. 24일 이삿짐을 다 빼고 난 집에서, 처음에는 슬리핑백으로 잠을 자볼까 고려했지만 조금이라도 짐을 줄여보자는 생각에서, 또 굳이 그렇게 불편하게 잠을 잘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에서, 동네 호텔을 잡은 것이다. 퀸 사이즈 침대가 두 개 나란히 놓인 방은 쾌적했다. 그 동안 혼자 이삿짐 싸랴, 물건 처분하랴 녹초가 된 아내는 호텔에 들어오자마자 쓰러졌다. 



...라고 말하면 퍽 이른 시간이었던 것 같지만 내가 에드먼튼 공항에 도착한 게 10시였기 때문에, 호텔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11시가 가까운 늦은 밤이었다. 



일찍 시작하는 동준이를 먼저 학교에 데려다 주고, 나머지는 맥도날드에 왔다. 성준이가 자기 앞에 세 개나 놓인 해쉬 브라운을 보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성준이를 스쿨버스에 태워 보내고 아내와 나는 집에 다시 한 번 왔다. 아직 마무리해야 할 짐이 여럿 있었다. 아내는 냉장고를 비워야 했고, 나는 차고 문을 여는 열쇠가 하나 고장나는 바람에 새 것을 사서 차고 문과 코드가 맞도록 조절해야 했다. 



이삿짐 센터에서 처음에 9천파운드 (약 4톤)로 추정했던 짐은 나중에 1만2천파운드 (약 5.4톤)나 되는 것으로 추정했다. 그만큼 이삿짐 차에 실려간 짐이 많았다는 뜻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잘하게 남아 밴으로 실어날라야 하는 짐이 여전히 만만찮게 남아 있었다. 



우리집을 산 사람들에게 건네주기로 한 열쇠들. 집으로 들어오는 현관문 열쇠와 우편함 열쇠, 그리고 차고 열쇠다. 맨 왼쪽 비닐봉지에 든 차고 열쇠가 고장난 것. 맨 오른쪽 것이 새로 사서 세팅한 열쇠다.



남은 짐을 밴에 다 우겨넣고 나서, 아내는 가깝게 지내던 이웃 몇에게 다시 작별 인사를 했다. 그 중엔 물론 주말마다 만났던 K선배 댁도 포함되었다. 나는 어제 너무 늦게 오는 바람에 K 선배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그저 전화로만 간단히 인사를 나눴었다. "예, 그 동안 고마웠습니다. 아쉽네요... 그럼 잘 지내시고 다음에..." 남자들의 인사는 늘 그처럼 데면데면한 건가? 


아내는 짐을 차에 다 싣고 나서 앞집 쥬디, 옆집 레베카 등과 아쉬움 가득한 포옹 인사를 나눴다. 특히 성준이가 한 살 아래인 앤드루와 자주 놀곤 했던 레베카와는 눈물바람 섞인 이별... 동준이도, 성준이도, 학교에서 이런저런 작별 선물을 들고 왔다. 어디에서 점심을 먹을까 하다가 K 선배 댁에서 김밥을 싸주신 덕택에, 그냥 피자를 테이크아웃해 가면서 먹기로 했다. 우리가 애용했던 닛자스 핏자에서...



최종 마무리까지 다하고 새알밭을 떠난 게 오후 한 시였다. 4백여 km를 달려 밴프까지 왔다. 오는 도중, 레드 디어 부근에서 트레일러 트럭이 전복되는 바람에 그 쪽 구간뿐 아니라 우리가 가는 도로까지 체증을 빚었다. 레드 디어는 에드먼튼과 캘거리 중간 지점에 있는, 인구 9만 정도의 산업 도시다. 



저녁 5시쯤 밴프에 예약해둔 호텔에 닿았다. 여우 호텔 (Fox Hotel & Suites)이라는 이름이다.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외관과 시설 세팅은 좋았는데, 방과 화장실 등이 너무 비좁았다. 모양에만 치중하다 실속을 희생하고 만 경우랄까? 그래도 처음 묵는 호텔이고, 전반적으로 깔끔해서 마음에 든다. 밴프의 한국 식당 '서울옥'에서 저녁을 먹으려고 막 호텔을 나서는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