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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얘기

SOLD!!


드디어 집이 팔렸다. 지난 목요일 (19일) 집앞에 'For Sale' 간판을 내건 지 꼭 8일 만이다.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납덩이 하나 내려놓은 듯 속이 후련하다. 야호~! 아니, 만세~!라고 소리라도 마음껏 내지르고 싶은 기분이다. 아내는 집이 최종적으로 팔렸다는 전화를 받자마자 밴쿠버의 부모님께, 또 한국의 언니들께 그 낭보를 달뜬 목소리로 전했다.



집을 과연 얼마나 빨리 팔 수 있을까, 어느 정도나 손해를 감수하고 팔아야 할까 걱정했다. 2009년 구입가는 35만3천달러. 여기에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부동산 중개료 1만5천달러를 더하면 아무리 못 받아도 36만8천달러는 받아야 그나마 큰 손해 안보고 팔았다고 할 수 있을 터였다. 이사 들어오면서 집안 전체를 마루바닥으로 바꾸느라 소비한 1만달러는 아예 건져볼 엄두도 못냈다. 4년여 동안 우리가 그런 바닥을 잘 이용하며 살았으니 그것으로 됐다고 위안하자는 쪽이었다. 그런 계산 끝에 부동산 중개업자와 상의해 우리가 내놓은 판매가는 37만4,900달러였다. 중개업자들은 집이 공원과 인접해 있어서 쉽게 팔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그들과 계약하기 전에 만난 세 명의 다른 중개업자들이 하나같이 36만9천달러 이상 받기 힘들다며 겁을 준 터여서, 우리는 그저 그 수준만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월요일에 집을 사겠다는 제안 (오퍼)이 두 곳에서 들어왔다는 통보를 받았다. 과연 얼마나 제안했을까? 궁금하면서도 불안해서 차마 중개업자에게 물어보지도 못하고 그 날 저녁을 기다렸다. 하나는 다른 부동산 중개업자 자신에게서 온 것이었다. 다른 클라이언트를 데리고 우리 집을 보러 왔다가 근처 공원을 보고 반했다고 했다. 우리가 제안한 값에 100달러를 붙여 37만5천달러를 제안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더없이 기뻤다. 와, 다행이다, 손해는 안보겠다...


다른 구매 희망자는 온타리오 주에서 온 젊은 부부라고 했다. 각각 네 살, 4개월 된 아이들이 있어서 공원 가깝고, 평판 좋은 초등학교를 끼고 있는 우리 집에 매력을 느꼈다는 전언이었다. 이들의 제안가는 38만6천달러!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우리가 내놓은 판매가보다 1만달러 이상 더 높은 가격이었다. 게다가 주택할부금이 이미 은행의 승인을 받은 상태고, 주택검사 전문가도 다음 수요일에 예약해놓았으며, 별 하자가 없다는 게 판명되면 금요일까지 계약을 완료할 수 있다는 조건까지 붙였다. 우리로서는 마달 이유가 없었다. 


집을 완전히 팔기까지 가장 큰 장애물은 주택 검사였다. 특히 구조상의 하자가 발견될 경우 계약이 무산되는 것은 물론 집 자체를 팔기가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미처 모르는 구조상의 결함이 집에 생기지 않았을까 노심초사했다. 한겨울이면 아래층에서 똑똑똑 들리던 물 떨어지는 소리가, 혹시 지붕 어디에 빈틈이 생겨서 그런 것은 아닐까 걱정했고, 거실 한쪽 벽의 돌출된 부분이 그런 물 때문에 뒤틀려 생긴 것은 아닐까 우려했다. 


수요일의 주택 검사가 끝나고, 계약의 최종 성사 여부가 판명되는 금요일까지, 시간이 길었다.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오퍼를 받았고, 주택 검사 전문가가 다녀갔노라는 말에 주위에서는 잘 됐다, 빨리 팔았다며 축하해 줬지만 우리는 마음놓고 즐거워할 수가 없었다. 애간장이 끓었다. 그러다 목요일 늦은밤, 예기치 않은 텍스트 메시지가 부동산업자로부터 날아왔다. 집 안의 몇 가지 설비에 대한 질문이었다. 나무를 때는 벽난로는 써봤느냐, 벽 한쪽의 스위치 두 개중 하나는 아무런 전등과도 연결되지 않았던데 무슨 용도냐, 부엌 천장의 덧붙인 듯한 자국은 뭐냐... 별로 어려운 질문은 아니어서 쉽게 답해주었다. 그리고 금요일이 되었다.


그러나 금요일이 되어서도 전화는 오지 않았다. 낮에 두 번인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 부동산 쪽에서 아무런 연락도 없었느냐고 물었지만 대답은 여전히 '없었다'였다. 아내도, 아니 아내야말로 나보다 더, 끌탕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오후가 되고, 저녁이 돼도 전화는 오지 않았다. 밤 아홉 시까지 전화가 없으면 계약은 무산되는데... 그러다 저녁 식사 직후, 일을 보러 나갔던 아내가 전화를 걸어 왔다. "방금 키어(부동산 중개업자 이름)에게서 전화를 받았는데 솔드(Sold)래!" 아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성준이가 서툰 솜씨로 엄마와 아빠를 찍어주었다. Sold...이 단어가 이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니!


회사 동료들이 적어준 송별 카드. 잘 가라, 잘 지내라, 행운을 빈다...


금요일 아침, 에드먼튼에서는 아마도 마지막이 될 달리기를 했다. 거리는 9 km 정도. 첫 서리가 내렸다.


달릴 때마다 보곤 하던 풍경. 이젠 '추억'의 한 장면으로 남게 됐다.


얼마 남지 않은 짐을 챙기던 중에 카메라를 자동으로 맞춰놓고 찍었다. 셀카다. 오른쪽 풍선은 전날인 목요일에 부서에서 송별회 티 파티를 할 때 썼던 것.


2012년에 라클라비쉬(Lac La Biche)라는 동네의 사진 공모전에서 우승해 받은 선물권 2백달러를 쓰려고 일삼아 오늘 (9월28일) 다녀왔다. 총 주행거리는 450 km 남짓. 그 길에서 만난 가을 풍경이다. (뜻밖의 우승 얘기는 여기. 날짜를 보니 작년 9월21일이다. 거의 1년 만에 상금을 찾아먹은 셈.)


그 선물권으로 이 가게에서 신발 두 켤레, 모자, 선글라스 따위를 샀다. 스노모빌, 낚시장비, 자전거 장비 등 주로 고가의 물품을 파는 곳이어서 200달러짜리 상품권으로 살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래도 그게 어디랴! 꼭 상품권을 써야 한다는 의무감 말고도, 이맘때가 알버타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풍철이어서 그 가을 빛깔을 감상해 보자는 심산도 있었다. (단풍나무가 없으니 단풍철이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지만...)


그 라클라비쉬의 호숫가 놀이터에서 잠시 쉬었다. 아내의 그네 타는 표정이 잠시나마 편안하고 행복해 보인다. 집을 팔았으니 이사 스트레스의 6, 7할은 던 셈이지만 아직도 이삿짐 싸는 일, 각종 서류 작업 등 갈 길이 멀다. 나는 내일(일) 아침 비행기로 밴쿠버에 먼저 간다. 아내에게 또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