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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얘기

식스 캔 두 잇!

성준이가 가장 좋아하는 '집시 데인저' 피겨. 책상 위에 곱게 모셔져 있다. 내가 만지면 왜 만지느냐고 꼭 이유를 캐묻는다. 좋아서 그런다면 아뭇소리 않고 있다가 팔이나 다리의 자세를 바꿔놓으면 잽싸게 정상으로 돌려 세워서 제 자리에 갖다 놓는다.


지난 토요일에 이어 화요일에도 '퍼시픽 림'을 또 보았다. 이번에는 평소 가깝게 지내는 선배, 후배와 함께. 아내도 아내지만 성준이에 대한 미안함이 더 커졌다. 3D 영화는 너무 충격적일 수 있으니 동네 영화관에서 2D로 보여줘볼까, 하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아내도 PG-13이라지만 본인이 그렇고 보고 싶어 하는데 한 번 물어나 보라고 했다. 다음은 대화 내용 (내 말은 우리말로 바꿨고, 성준이 말만 그대로 옮겼다).


"퍼시픽 림 영화 보여줄까?"

"Today?"

"응, 새알밭 영화관에서. 보러갈래?"

"But daddy, I am six. I am too young to watch the movie..." (내가 영화가 PG-13이라고, 열세 살이나 돼야 볼 수 있다 너무 강조했나?)

"괜찮아, 아빠가 같이 갈 거니까."


그러자 체르노 알파, 크림슨 타이푼 등이 카이주를 무찌르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영화 처음에는 카이주들이 이긴다고, 카이주들이 집시 데인저도 파괴하는데, 그 장면들이 아주 '스케어리' 하다"면서, 그래도 볼 수 있겠느냐고 또 물었다. (이건 보여주겠다는 거냐, 말겠다는 거냐?)


"But daddy, I don't want to see Gypsy Danger broken. It's too sad and scary. I don't like it."


하여, 끝내 퍼시픽 림을 영화관에서 보여주기로 한 계획은 포기하기로 했다. 영화 시작 5분 안에 더 못보겠다고, 무섭다고, 울면서 나가자는 말을 할 확률이 99% 같았다. 나중에 컴퓨터로 보여주자고 했다.


그래도 마음의 빚은 여전히 남아서, 영화 '퍼시픽 림'의 전사(프리퀄)를 다룬 만화를 보여주는 것은 어떨까 싶어 서점에 가보자고 했다. 성준이야 물론 오케이. 동네 서점 인디고에 갔다. 해당 서적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온라인으로 확인했기 때문에 점원에게 찾아달라고만 하면 간단했다. 나 자신도 만화 내용이 어떨지, 그림은 또 얼마나 잘 그렸을지 퍽이나 궁금했었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 분량도 너무 적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집시 데인저를 비롯한 로봇(예거)들이 만화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성준이도 죽 훑어보며 로봇을 찾는 눈치더니 별로 마음에 안든다고 했다. 이것으로도 만회가 안되는구나...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왜 나 혼자 이렇게 찔려 하지?) 서점 안에 있는 컴퓨터로 'Robot'을 검색해 봤다. 제일 먼저 뜨는 게 'Tin Can Robot' 완구였다. 맥주 캔을 이용해서 움직이는 로봇을 만드는 아이디어였다. 그래, 이거라면? 


성준이에게 '퍼시픽 림'을 보여주지 못한 데 대한 미안함을 달래주기 위한 - 본인은 잘 모르지만 - 보상 선물. 틴 캔 로봇. 그림 속의 '틴', 그러니까 맥주/음료수 캔은 박스 안에 들어 있지 않다. 집에서 굴러다니는 폐품을 재활용하시란다. 하여 성준이 오른손 근처의 초록색 활자 'Green'이 붙었다. 알량하긴...


성준이보고 '틴 캔 로봇'을 찾아보라고 하니까 서점의 어린이 코너로 달려가 0.1초만에 찾아낸다. 이건 어떠니, 해보고 싶니? 예쓰!라는 흥분에 찬 대답. 박스에는 8살 이상을 대상으로 한 장난감이라고 돼 있다. 엄마나 아빠한테 도와달라고 안하고 너 혼자 할 수 있어? 


"Of course~! I am six. Six can do it!" 천하무적 여섯살 -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쳤다. 그래 한 번 보자꾸나.


살 당시, 그리고 이 사진을 찍을 때까지만 해도 의욕은 '혼자 할 수 있다, 식스 캔 두 잇!'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하지만...


집에 와서 박스 포장 뜯어주고, 배터리 주고, 스크루드라이버 주고, 너 혼자 해보라고 놔둬 봤다. 한 10분이나 흘렀을까? 


"Uh...daddy, this is too hard. I need your help..." 그럼 그렇지... 그래도 이번에는 아빠한테만 맡겨두지 않고 저도 도와주려고 제법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드디어 완성! 엇박자로 굴러가게 돼 있는 바퀴와 모터, 팔 따위를 빈 맥주 캔에 붙이는 아이디어다. 집에 남아 있는 캔이 '올드 밀워키' 캔밖에 없어서 그걸 썼다. 


최종 완성품. 맥주 캔을 감은 두 테가 헐렁헐렁하니까 테이프로 고정을 했고, 위에 큰 눈 두 개만 덜렁 있으니까 아쉬웠던지 웃는 입 모양을 만들어 앞에 붙였다. 오늘 아침에 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