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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얘기

가깝고도 먼 밴쿠버

여름의 짙은 녹음을 보여주는 노쓰사스카체완 강변과 그 너머 알버타 대학 캠퍼스.


못가겠노라 응답 준 게 지난 금요일이었는데, 며칠 지난 지금도 마음 한 구석은 헛헛하다. 아직도 혼자 가만히 앉아 있노라면, 그냥 갈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떠오르곤 한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날아간 화살인 것을...


지난 달, 밴쿠버에 있는 한 공기업의 프라이버시 매니저 자리에 지원했다. 노트북 영상과 병행한 전화 인터뷰를 거쳤고, 곧바로 신원 조회와 추천인 세 명의 이름과 연락처를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인터뷰를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래서 큰 기대를 걸지 않았던 나로서는 다소 의외였지만 마달 이유는 없었다. 처음 제공한 추천인들 중 두 명이 공교롭게 휴가를 떠나는 바람에 다른 추천인을 구하느라 애를 먹기는 했지만 대체로 별 탈 없이 지나갔다. 


그리곤 지난 주, '예상한' 전화가 왔다. 일자리 제안 전화였다. 급여 이야기가 나왔고, 나는 에드먼튼에서 밴쿠버로 이주하는 데 따른 이사 비용을 사측에서 지원하는지, 또 알버타 주정부에서 들고 있는 연금이 해당 기관의 연금으로 이전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저쪽의 인사 담당자는 둘 다 잘 모르겠다며 - 연금 '스페셜리스트'가 마침 그 날 안나왔단다 - 다음날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어찌어찌하다가 하루가 그냥 갔다.


이틀 뒤 다시 통화가 됐다. 급여는 그 쪽에서 처음 제시한 금액과 내가 요구한 금액 중간쯤에서 결정됐고, 이주비 지원은 회사 정책에 나와 있지 않아 불가능하며, 연금 이전 여부는 자기네도 잘 모르겠으니 본인이 일단 BC로 온 뒤에 알아보는 게 좋겠다는 대답이었다. 결국 내가 알고 싶었던 내용은 하나도 충족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저쪽 인사 담당자는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듯, 우리쪽 조건이 좋지 않느냐, 업무 시간도 일주일에 35시간밖에 안되고 휴가도 4주나 주며, 혜택도 많다고 자랑했다 (참고로 내 업무 시간은 36.25 시간, 연 휴가는 5주다). 구체적인 혜택 내용을 보내줄 수 있느냐고 물으니 공식적인 일자리 제의 편지 (이메일)를 보낼 때 함께 첨부할 것이라고 했다. 


다음날 오후, 다섯 개의 첨부 파일과 함께 정식 제의 메일이 들어왔다. 그쪽에서 그렇게 좋다고 자랑한 혜택이며 근무 조건도 이곳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굳이 따진다면 이쪽이 더 나았다). 그러나 그 메일을 받기 전에, 마음은 이미 'NO'로 정해져 있었다. 꼭 이사 비용을 지원하지 않고, 연금 이전 여부가 불투명하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두 사항도 매우 중요했다. 1만달러 안팎의 이사 비용을 감당하기가 부담스러울 것은 분명했고, 10년 가까이 부어 온 연금을 포기하고 BC에서 새로 연금을 시작할 경우의 손해 비용도 감당하기 어려울 게 뻔했기 때문이다). 


올 봄과 초여름, 동준이가 참가했던 '프리 투 비 미' (Free2BMe) 사이클 어드벤처 프로그램. 한 주에 한 번씩 열린 이 프로그램을 통해 동준이는 총 22km의 트레일을 자전거로 달렸다. 그 엄마와 아빠로서는 더없이 대견하게 생각하는 성취다. 


정작 더 큰 이유는 동준이의 교육 문제였다. 동준이가 필요로 하는 BC 주의 교육 프로그램이나 정부의 지원 시스템이 알버타 주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BC 주와 알버타 주 간의 특수 교육 프로그램 지원 수준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하기사 부자 주와 가난한 주 간의 차이를 고려하면 응당 예상했어야 할 대목이기는 했다 (하지만 BC 주는 기후 환경에서만은 부자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BC 주의 캐치프레이즈도 'Super. Natural'이다. 자연 조건은 알버타도 좋지만 길고 혹독한 겨울이 문제다). 


이를테면 알버타 주의 경우 스무 살까지 고등학교(혹은 고등학교에서 제공되는 특수 프로그램)에 머무를 수 있는 데 비해 BC주는 열아홉 살까지밖에 안된다 (알버타 주의 새 교육법이 통과되면 스물 한 살로 연장된다). 또 동준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정부에서 지급되는 월 지원금도 알버타 주는 1500달러인 데 비해 BC주는 최대 900달러에 불과하다. 알버타 주는 AISH(Assured Income for the Severely Handicapped)라고 부르는 '법제화된' 장애인 지원 프로그램이 명료하게 정착되어 있지만 BC주는 그렇지 못하다. 

 

그 이전에, 고등학교 차원에서 동준이 같은 장애 학생들에게 제공되는 교육 프로그램도 BC는 턱없이 부족하다. 1 대 1로 붙는 보조교사도 BC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대답이었다. 이곳에서는 동준이가 9월부터 고등학교에 올라가 그와 같은 아이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에 들어가기로 돼 있는데, BC쪽에 문의해 보니 동준이와 같은 경우라면 학교 프로그램이 아닌 커뮤니티 적응 프로그램이 더 맞을 것 같다는 응답이었다. 자폐증 자녀를 둔 부모들이 설립한 특수 학교가 밴쿠버에 몇 개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지만 월 학비가 1600달러나 했다. 설령 비용을 감수하기로 결정한다고 해도 지원자가 많아 몇 달, 혹은 심지어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나올 수도 있었다. 


동준이가 갈 수 있는 프로그램과 BC 주의 지원 제도에 대해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아내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연중 따뜻한 날씨의 밴쿠버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희망도 점점 더 사그라들었다. 반면, 겨울은 지겹도록 길고 혹독하지만 알버타 주가 이렇게 좋은 곳이었구나, 이렇게 많은 지원과 혜택을 베풀어주고 있었구나, 새삼 깨닫고 고마워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쨌든 동준이를 위해서는 알버타 주가 제일인 것 같다는 게 우리의 전날 결론이었다. 


하나를 고르면 다른 하나를 버릴 수밖에 없다. 아직은 그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을 깨끗이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곧 잊어버리겠지. 세상 일은 언제, 또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으니까... 아내는 농담 삼아 이렇게 말했다. "밴쿠버 갈 기회가 지금까지 두 번 있었는데 사정 때문에 못갔지만, 세 번째 기회가 왔을 때는 진짜로 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Third time's a charm이라고..."

Job offer를 받아들였다면 근무하게 됐을 오피스 빌딩을, 2007년 9월에 찍은 사실을 우연히 알았다. 밴쿠버의 스탠리 공원에서, 맞은편 '웨스트 밴쿠버'를 보며 찍은 사진들 중 하나였다. 기분이 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