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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대전 Z

영화 ‘세계 대전 Z(World War Z)의 ‘Z(캐나다에선 ‘zed, 미국에선 ‘zi’로 발음한다)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좀비(zombie) Z가 아닐까 추측만 할 뿐이다. 하지만 영화 속의 괴물/감염자/공격자들을 좀비라고 부르기는 다소 망설여진다. 우리가 흔히 아는, ‘앞으로 나란히’ 자세로 느릿느릿 졸린 듯 굼뜨게 걷는 그런 좀비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가 영화 속에서도 ‘좀비’라는 말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그 단어를 회피한 듯한 인상마저 든다 (스쳐 지나가듯 두 번쯤 나온 것 같다).

 

‘세계 대전 Z’는 실상 좀비 영화라기보다는 요즘 들어 일종의 ‘흐름’을 형성하는 돌연변이 전염병에 대한 영화라고 보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1340년대 약 25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으로 알려진 유럽의 흑사병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SARS, 조류 독감, H1N1 같은 근래 사례를 통해, 미처 적절한 백신이나 치료제를 마련할 틈도 없이 사람이나 동물을 통해 빠르게 전파되는 전염병의 무서움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세계 대전 Z’는 그처럼 가공할 만큼 빠르게 전염되는 원인 불명의 전염병과, 좀비를 연상시키지만 그 공격성과 속도, 파괴력은 몇 배나 더 큰 괴물을 적절히 결합함으로써, 대중이 느낄 수 있는 공포감을 증폭시킨다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대니 보일의 묵시록적 좀비 영화 ‘28일후’에서, 28일 뒤가 아닌 그 28일간 벌어진 대재난의 아수라장을 보여준다고 할까?

 

영화는 주인공 전직 UN 수사관인 제리 레인 (브래드 피트)이 사는 필라델피아에서 시작한다. 꽉꽉 미어터진 도로 위에 하릴없이 정체된 차 안에서, 레인과 아내, 두 딸은 지루함을 이겨보려고 스무고개 수수께끼를 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경찰 순찰 오토바이가 레인이 탄 차의 백미러를 깨트리며 급히 어디론가 달려가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폭발음이 들린다. 갑자기 수많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미친듯이 달아난다. 레인과 가족도 차 밖으로 나온다. 거대한 쓰레기 수거차가 정차된 승용차들을 종잇장처럼 짓이기고 들이박으며 폭주하다 뒤집힌다. 달아나는 사람들 위로 다른 사람들이아니 이미 사람이 아니게 된 괴물들이덮친다. 목을 물어뜯는다. 물어뜯긴 희생자들은 길가에 널부러져 간질 환자처럼 몸을 뒤틀고 경련 증세를 보인다. 그러다 갑자기 살아난다. 그리고 폭주한다.

 

저런 시퀀스가 수십 수백 배의 규모로 순식간에 증폭되면서 평화롭던 필라델피아 시의 아침은 공포와 광란의 종말로 치닫는다. 카메라는 키 높이에서 하늘로 죽 올라가며 레인과 가족이 서 있던 도로 위를, 그 도로가 이어지는 도시의 마천루 위를 부감으로 잡는다. 도로 위를 빼곡하게 메운 채 정지된 자동차들, 말끔하고 현대적인 도시 건물들 사이로 폭주하는 인간들, 비인간들의 움직임이 마치 바쁘고 무작위적으로 움직이는 개미들처럼 드러난다. 빛의 속도에 버금갈 것처럼 급속하게 번지는 그런 전염병은 전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인류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워진다.

 

그런 상황에서 제리 레인은 마지막 희망이 된다. 그 전염병의 진원지를 찾아 발병 원인을 규명하고, 궁극적으로 치료 백신을 만들 근거를 제공하는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본인도 원치 않고, 가족도 원치 않는 상황이지만 레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세계의 위험천만한 내전 지역만 돌며 근무한 레인은 “이젠 더 이상 할 수 없다. 가족과 또 다시 떨어질 수 없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게 더없이 설득력있다고 생각했다.) 레인은 전염병의 진원지를 찾아 한국으로, 이스라엘로, 다시 웨일즈로 날아가고, 그 과정에서 온갖 위기와 고초를 겪는다. (한국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한국에 있는 미군 기지로, 실제 한국의 풍경은 단 한 컷도 나오지 않는다.)


영화는 기대 이상이었다좀비들의 폭주를 보여주는 영화 예고편에다브래드 피트가 나온다는 점 때문에 아직 영화 평이 나오기도 전에 예매를 해버려서 다소 위험 부담도 있었지만결과적으로는 잘 만들어진 영화 한 편을 본 셈이 됐다뭇 언론의 영화평을 모아 싱싱한/썩은 토마토를 아이콘으로 보여주는 ‘Rottentomatoes.com’의 결과도 ‘싱싱하다’는 쪽이었다 (625일 현재 68%).


영화의 결말이 다소 싱겁다거나 ‘소프트하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는데영화의 내용과 맥락을 찬찬히 따져보면그런 결말 이외에 다른 어떤 굉장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끝맺을 수 있을지 다소 의심스럽다나도 좀 맥빠진다는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그럴 수 있겠다고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 대전 Z’는 브래드 피트의 영화다. 그가 맥스 브룩스의 원작 판권을 산 주인공이고, 영화 제작에도 직접 참여했다는 점 때문만이 아니다. 영화의 내용 자체가 실상은 그가 분한 제리 레인 한 사람의 활약으로 유지되고, 발전하고, 완성되기 때문이다. 피트의 제리 레인은 실로 믿음직스럽다. 신뢰를 준다. 고함 한 번 지르지 않고, 불같이 화내는 장면도 없고, 멋지게 안무된 액션 신도 별로 나오지 않지만, 레인의 침착하고 명민하면서도 당황하지 않는 얼굴 표정과 행동은, 영화 전체에 안정감을 불러온다. 그만큼 브래드 피트의 연기는 연기 같지 않다. 별로 많이 나오지 않지만 그의 아내 역을 맡은 미레이 이노스 (Mireille Enos)나 다른 조역들의 연기도 더없이 자연스럽고 안정되어 있다 (미레이 이노스는 TV 드라마 ‘더 킬링’의 여자 주인공 역으로 친숙하다).

 

브래드 피트는 조지 클루니, 톰 크루즈, 매트 데이먼, 벤 애플렉 등과 더불어 ‘멋있게 늙어가는’ 배우들 중 한 명이다. 갈수록 더욱 성숙한 매력을 보여주는 피트가 퍽 인상적이었다. 내 별점은 다섯 개 만점에 ★★★★. 아래는 영화 '세계 대전 Z'의 예고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