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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로봇의 로망 '퍼시픽 림'


영화는 까만 화면 위에 두 단어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카이주 (Kaiju): ‘괴수(怪獸)’를 가리키는 일본 말.
예거 (Jaeger): ‘사냥꾼’(hunter)을 뜻하는 독일 말.


그 두 단어는 영화 전체를 요약하는 핵심어이기도 하다. 카이주와 예거의 싸움. 괴수와 거대 로봇의 싸움.

올해 가장 기대하고 고대했던 영화 ‘퍼시픽 림’ (Pacific Rim, 환태평양)을 아내와 함께 보았다. 그것도 아이맥스 3D로. 우리보다 더 그 영화를 고대한 사람 – 우리집 막내 성준이 –이 있었지만 ‘부모 지도하에 13세 이상 관람가’(PG-13)라는 등급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실은 우리가 그 영화를 보러 간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몰랐다. 적어도 내 딴에는 먼저 보고, 혹시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보여줄 만하다고 판단되면 직접 데리고 와서 보여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결론은 ‘아니올씨다’였다. 로봇, 아니 예거와 괴수들 간의 격투 장면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격렬했고, 처절했고, 폭력적이고, 결사적이었다. 더군다나 남들보다 더 예민한 성준이라면 영화 시작한 지 채 5분도 못돼서 울 것 같았다. 나중에 DVD로 보여주자, 혹은 더 나중에...


‘퍼시픽 림’은 나처럼 일본의 마징가Z – 그리고 그 계보를 잇는 그레이트마징가, 그랜다이저 – 와 한국의 로보트 태권V 같은 거대 로봇 만화와 만화영화들을 보며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로망이었고 ‘꿈의 실현’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저 레버 몇 개로 마징가Z나 로보트 태권V 같은 거대 로봇을 조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느끼고 있었지만 그 끝을 모르는 어린이의 상상력이 그 불가능을 너끈히 메워주었고, 그 거대로봇들의 조종석에 스스로를 앉혀주곤 했었다.


‘헬보이’, ‘판의 미로’ 같은 수작 영화들로 유명한 멕시코의 길레르모 델 토로 감독 역시 어린 시절을 나와 비슷한 꿈과 환상 속에서 보낸 것이 분명했다 (그는 1964년생이다). 영화 개봉 전에 찔끔찔끔 맛보기로 나온 예고편과 짤막한 영화 제작기(피처렛)들은 그런 사실을 명징하게 드러내 주고 있었다. 일본 팬들을 대상으로 한 예고편에는 아예 본인이 직접 나와 퍼시픽 림 제작에 영감을 준 데 감사한다고 말했다. (일본의 로봇 만화들을 그저 열심히 수입해 한국말로 번역/번안해 보여주면서 마치 한국 작품인 것처럼 어린이들에게 거짓말이나 할 줄 알았던 한국으로서는 참 부러우면서도 입맛이 쓴 대목이었다. 누구는 로보트 태권V가 국산이라고 하는데, 그 또한 넓게는 일본 로봇 만화의 표절이자 아류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퍼시픽 림의 내용은 비교적 단순하다. 태평양 심해에 난, 서로 다른 차원을 연결하는 ‘포털’ (입구, 혹은 출구)을 통해 속속 출현해서 인류 문명를 무차별 파괴하고 인명을 학살하는 초거대 괴수들에 맞서 인류가 개발한 초거대 로봇(예거)들이 치열한 사투를 벌인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내용을 다루는 방식에서 압도적인 스케일과, 실제와 컴퓨터 그래픽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하고 역동적으로 묘사된 예거와 괴수들의 움직임, 전투 장면들로 영화팬들을 사로잡는다. 더욱이 아이맥스 3D의 거대하고 입체적인 화면과 파워풀한 음향으로 감상하는 두 ‘몬스터’들의 충돌 - '우리는 몬스터를 잡기 위해 몬스터를 만들었다'는 게 영화 캐치프레이즈 중 하나다 -은, 보는 이들의 시각과 청각의 한계를 극한까지 몰아가는 듯하다. 음향 효과 또한 더없이 사실적이다.


퍼시픽 림의 또 다른 미덕은 그저 스케일과 특수 효과로 사람들의 시각과 청각에만 자극을 주는 게 아니라, 여러 인간적 드라마를 적절히 섞어 부족하긴 하지만 꽤 괜찮은 감동까지 안겨준다는 점이다. 비록 널리 알려진 스타 배우들은 아니지만 주인공 파일럿 랄리 베켓 역할을 맡은 찰리 허넘과 예거 프로젝트의 총사령관 스태커 펜티코스트 역을 맡은 이드리스 엘바 등의 연기는 흠잡을 데가 없다 (주인공 ‘허넘’(Hunnam)을 독일식으로 읽으면 ‘훈남’이다. 과연 그의 마스크에 어울리는 이름 아닌가 하하).


 

퍼시픽 림은, 적어도 로봇의 액션 장면들에 관한 한 내가 기대했던 수준을 훨씬 더 넘어섰다. 예상했던 수준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고 사실적이고 강렬하고 비장했다. 무엇보다 80 m가 넘는 거대 로봇을 조종하기 위해서는 한 명 아닌 두 명 – 중국산 ‘크림슨 타이푼’의 경우는 세 쌍둥이 – 이 필요하고, 엉성한 대여섯 개의 레버를 조작하는 대신 일종의 가상현실 기술을 통해 조종사의 몸짓이 로봇의 몸짓과 동조되도록 하는 방식으로 조종한다는 아이디어도 그럴 듯했다. 두 조종사가 로봇의 왼쪽과 오른쪽 – 혹은 좌뇌와 우뇌 – 을 맡되, 두 사람이 일체화된 움직임을 유지할 수 있도록 둘의 기억과 경험과 생각을 공유시키고, 뇌파를 동조시키는 - 이를 'Neural handshake'라고 표현했다 - ‘드리프트’(drift) 기법이 작동된다는 개념도 기발했다. 일본의 아니메 ‘에반게리온’을 연상시키는 대목이기도 했다.

 

델 토로 감독도 대놓고 일본의 거대 로봇, 거대 괴수 내러티브의 영향을 언급했고, 그에 대한 존경을 숨기지 않았지만, 실제로 영화 곳곳은 어디에선가 본듯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가령 괴수들이 태평양 심해에서 나타난다는 설정은 일본 만화 ‘게타로보’의 설정과 닮아 있다. 영화에서 가장 큰 활약을 펼치는 미국산 로봇 ‘집시 데인저’의 강력한 펀치는 마징가Z의 ‘로케트 주먹’을 떠올리게 한다 (오른 주먹으로 괴수를 강타할 때 팔꿈치에서 제트엔진이 분사된다). 그런가 하면 하늘을 나는 괴수의 손아귀에서 탈출할 때 사용하는 칼은 그레이트마징가의 칼과 필연적으로 연결된다. 손에서 나오는 광선이나, 등에서 분출되는 제트 추진 연료도 두 로봇들과 닿아 있다.


성준이가 '퍼시픽 림'의 예고편과 피처렛들을 보고 상상해서 그린 카이주와 예거 (주로 집시 데인저) 간의 싸움. 실제 영화를 본 것처럼 나름 생생함이 살아 있어서 옮겨보았다. 함께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영화의 백미는 집시 데인저가 홍콩의 빌딩가에서 괴수 두 마리와 벌이는 육박전인데, 일찍이 어떤 만화나 실사 영화에서도 제대로 구현된 적이 없는 현장감과 격렬함을 더없이 잘 살렸다. (영화의 주무대를 미국이 아닌 홍콩으로 설정한 점, 대표 로봇이 미국산인 집시 데인저지만 영화 ‘트랜스포머’에서 정말 역겨울 정도로 자주 표출되곤 하던 미국 우월주의를 드러내지 않는 점, 로봇 조종사들을 비롯해 과학자, 로봇 전진기지인 홍콩 ‘섀터돔’(Shatterdome)의 엔지니어들이 다양한 국적을 보여준다는 점 등도 영화의 호감을 더해주는 요소였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든 생각은 영화관에서 한 번쯤 더 봤으면 좋겠다는 것, 그리고 2탄을 기대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었다. 적어도 첫 주말의 흥행 성적만 놓고 보면 아무래도 속편 제작은 어려워 보인다. 영화 비평가들의 압도적 호평 (‘썩은 토마토’가 집계한 뭇 언론의 호평 비율은 72%)에도 불구하고 2위도 아닌 3위에 그쳤기 때문이다. 1위는 애니메이션 ‘디스피커블 미 2’가, 2위는 평단의 압도적 혹평 (‘썩은 토마토’의 호평 집계는 7%. 수많은 언론이 ‘쓰레기 같은 영화’라고 ‘디스’했다)에도 불구하고 애덤 샌들러의 화장실 코미디 ‘그로운 업스 2’였다 (애틀랜틱 와이어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 후진 영화를 봤다면서, 미국인들의 후진 영화 감각을 개탄했다).

 

미국내 흥행이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은 일찍부터 있어 왔다. 일본이나 한국과 달리 ‘거대 로봇’ 만화나 영화의 전통이 없다는 점이 그 이유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퍼시픽 림이 미국 밖에서 선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입소문이 더 널리 퍼지고 흥행도 더 잘돼서, 속편이 꼭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 별점은 볼거리로는 ★★★★★, 스토리와 연기 등을 포함한 전체 평점은 ★★★☆. 


영화 감상기를 마치기 전에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를 옮겨놓는다. 사령관 스태커의 연설이다. 


"Today, at the edge of our hope, at the end of our time, we have chosen not only to believe in ourselves, but in each other. Today we face the monsters that are at our door, today we are canceling the apocalypse!"


아래는 영화의 최종 예고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