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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번 여우 (Fox 8)

'8번 여우 이야기' (Fox 8: A Story)는 미국의 저명한 단편 작가인 조지 손더스 (George Saunders)의 단편이다. 아마존 킨들의 '킨들 싱글' 시리즈로 나왔다. 


짤막한 단편 하나만 99센트에 파는 이 싱글 시리즈에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최근 손더스가 단편집 '12월10일' (Tenth of December: Stories)로 뭇 언론의 높은 주목을 받으면서 '8번 여우 이야기'도 내 굼뜬 레이다에 잡혔다. '12월10일'을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처음 몇 페이지만 끄적거리다 돌려준 경험이 있어서, 일종의 부채감도 작용했고, 무엇보다 손더스의 작품이 대체 어떻길래? 하는 호기심이 더 컸다. 


'8번 여우 이야기'는 여우들 사이에서 8번으로 불리는 - 따라서 다른 여우들도 다 번호로 불리는데, 숫자가 높을수록 원로다. 이를테면 22번은 여우들 사이에서 장로쯤 된다 - 한 '튀는' 여우의 이야기다. 


다른 여우들에 비해 유독 호기심이 많은 8번은 숲 근처의 한 집 근처에 숨어서, 저녁때마다 엄마가 아이에게 읽어주는 '침대맡 이야기' (bedtime stories)를 엿듣는다. 그러면서 인간('Yuman')의 말을 깨우치고, 인간 세상에 대한 8번 여우의 호기심도 더욱 깊어진다. 그러는 사이 8번이 사는 숲은 불도우저에 밀려 쇼핑몰과 주택가로 대치되고, 여우들에게 일생일대의 위기가 닥친다. 8번은 과연 자신과 동료들을 구할 수 있을까?



소설은 8번 여우의 시각에서, 그의 말로 전개된다 ("Deer Reeder: First may I say, sorry for any werds I spel rong. Because I am a fox!"). 그래서 오탈자 천지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고, 실은 그 의도적 오탈자들이 이 소설을 읽는 매력 중 하나이다. 


처음에는 일본의 유쾌한 애니메이션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을 연상했다. 그러나 아니다. 짧디 짧은 이 소설은 8번 여우의 순진하고 때로는 유머러스한 묘사와 톤에도 불구하고, 퍽이나 비극적이고 현실적이다. 인간과 여우, 혹은 다른 동물들은 공존할 수 없는가? 도대체 죄없는 여우를 무자비하게 구타해 죽인 뒤 낄낄대고 하이파이브를 하며 즐거워하는 저 인간들의 속내는 무엇인가? 




짧지만 그 여운은 긴 현대의 우화. 조지 손더스의 전작들을 좀더 읽어보고 싶어졌다. 8번 여우가 인간을 향해 쓴 이 편지에 대해, 우리는 어떤 대답을 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