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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과 이성

소셜 네트워킹 시대의 프라이버시: “새로운 프라이버시 관(觀)이 필요하다”

지난 3월1일부터 구글의 새로운 ‘통합 프라이버시 정책’이 시행되었다. 60개에 이르는 계열 서비스들을 모두 연결하고, 이를 단일한 프라이버시 정책으로 묶는 구글의 계획은 여러 프라이버시 옹호 시민단체, 캐나다의 연방 프라이버시 커미셔너, 유럽연합 프라이버시 위원회 등의 의심과 반발에도 불구하고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앞으로 나오게 될 이들 시민 단체와 감시 기구들의 공식적인 조사 결과와 결정에 따라 구글의 프라이버시 정책에 변화가 올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피해는 – 만약 있다면 – 이미 저질러진 마당이다. 
 
다 이런 식이다. 특히 모든 것이 너무 빨리, 그리고 너무 광범위하게 진행되는 온라인의 세계에서 그러하다. 일단 저질러놓고 본다. 네티즌, 시민 단체, 감시 기구들이 여기에 반발하며 수정을 요구한다. 앗 미안, 다시 원상태로… 하지만 겉으로만 원상복귀일 뿐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미 충격은 가해졌고, 피해도 초래됐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다. 다시 생뚱맞고 파격적이기까지 한 프라이버시 정책 – 하지만 실상은 프라이버시 수준을 도리어 낮춘 정책 – 이 일방적으로 발표된다. 그에 대한 재반발. 앗 이것도 아니야? 미안, 다시 원상태로…

이처럼 풍선 띄워 여론을 재거나, 슬쩍 옆구리를 찔러 반응의 수준을 재는 행태에서 페이스북은 가히 ‘달인’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걸핏하면 개인 정보의 일부를 공개 정보라고 강변하며 일방적으로 열었다가 네티즌의 반발이 거세면 슬쩍 물러나는 척했다가, 다시 잊을 만하면 휙 열어젖히고, 다시 닫는 척하고, 다시 열고, 하는 행태.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수많은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들이 어떻게든 프라이버시의 담장을 낮추거나 아예 헐어 버리려 애를 쓴다. 개인정보가 곧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들의 화폐인 본질적 특성을 고려하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최근에는 아예 '프라이버시'라는 말 자체를 빼버렸다. 이제는 그냥 '데이터 이용 정책'이다. 사악하달 밖에...

너무 앞서 나간 비관론자나 경망스런 논평가들은 그런 추세에 “프라이버시는 죽었다"라고 나팔을 불고, 그 반대편의 또 다른 극단론자들은 아예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들에 대해 빗장을 지르고 온라인에서 자기 이름과 정보를 지운다. 혹은 지우려 애쓴다. 물론 어느 쪽도, 현명하기는 고사하고 현실적이지도 못하다. 지금의 ‘소셜 웹’ 흐름이 결코 한 번 지나가고 말 바람이나 유행이 아니고, 도리어 사회의 한 존재 양식처럼 자리를 잡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대응, 소셜 미디어의 장점을 활용하면서도 자신의 프라이버시 또한 적정 선에서 관리하는 –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 – 방안을 찾는 일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미국의 공영 라디오 방송 NPR은 최근 과학 기술 부문의 전문가들에게 ‘온라인 시대의 프라이버시’에 관해 조언을 구했다. 현명한 온라인 프라이버시 관리법은 무엇일까? 디지털 시대에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잘 보호할 수 있는 좋은 습관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우리 자녀들은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다음은 그 결과다. 

데이비드 코비아 (David Kobia, ‘우샤히디’ 기술부문장):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소셜 미디어가 아니다. 우리가 들고 다니는 휴대전화에는 데이터를 모으는 센서가GPS, 근접도, 소리, 빛, 가속도계 등8-10개에 이른다. 마치 자동차가 배기 가스를 배출하듯, 우리는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며 ‘배기 데이터’를 배출하는 꼴이다. 가령 구글만 해도, 설령 우리가 로그아웃 해도 여전히 우리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이길 수가 없는 전투다. 이것은 신기술을 이용하고, 아이패드, 스마트폰을 쓰기 위해 지불하는 비용이다.”

캐런 위크리 (Karen Wickre
, 트위터의 편집장): “트위터에 합류하기 전 구글에서 9년간 일하면서 프라이버시에 대한 내 감각도 바뀌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밀한 개인사까지 속속들이 공유하게 됐다는 뜻은 아니다. 사진이나 여행기, 좋아하는 음악 따위를 좀더 자유롭게 공유한다는 뜻이다. 비밀번호를 어렵게 설정하고 주기적으로 바꿔준다거나, 금융 정보나 내밀한 개인사를 공개하지 않는 등의 원칙은 여전하다. 내가 정작 우려하는 것은 기업 수준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정부 역시 그들 손아귀 안에 있는 셈이어서 정부가 어떤 효율적인 규제를 취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법규를 정하는 정치인들에게 누가 돈을 대는지 보라.” 

루크 플레머 (Luke Flemmer, 랩49 최고 기술 책임자): “우리는 마치 중세 시대의 촌락에 사는 것처럼 서로의 일상을 훤히 꿰고 있다.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 각자 선택할 수 있음에도, 아이들은 아무런 프라이버시의 개념 없이 자란다. 우리는 마치 소셜 미디어만이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것처럼 믿도록 강요 당한다. 하나의 문화로서, 우리는 결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서로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또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개인’의 개념이다. 나는 이것이 20세기 말에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나’만을 생각하는 나르시시즘은 소셜 미디어의 출현과 더불어 고비를 넘겼다.”

셰리 터클 (Sherry Turkle
, MIT 교수, ‘기술과 자아’ 프로젝트 주도): “우리는 인터넷과 함께 자라서, 인터넷도 우리처럼 다 자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문제는 처음에 인터넷에 프라이버시의 문화를 만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프라이버시 없는 친밀성(intimacy)이란 무엇인가?’, ‘프라이버시 없는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같은 것인데, 우리는 인터넷을 만들 때 이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자녀에게 그런 문화를 물려줘 놓고 우리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요즘 애들은 프라이버시에 신경 안써’라고 전가한다. 하지만 자녀들을 가르치는 것은 우리들의 책임이다. 페이스북의 CEO 마크 저커버그가 프라이버시는 더 이상 사회의 규범이 아니라고 했을 때 나는 너무나 화가 나서, 평소에 전혀 하지 않던 트윗까지 날렸다. 프라이버시가 소셜 네트워크와는 관련이 없을지 몰라도, 우리의 친밀성과 민주주의에는 꼭 필요한 것이다. 기술은 사람들을 바보로 만든다. 근본적인 가치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잊게 만들곤 한다.”

크리스 앤더슨 (Chris Anderson
, 월간지 ‘와이어드’의 편집장): “나는 온라인에서 적극적이고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아내는 전혀 그렇지 않다. 아이들은 아직 너무 어리지만 멀지 않아 두 그룹을 갖게 될 것이다. 지나칠 정도로 일상을 공유하게 될 ‘친구’ 그룹과, 의도적이고 목적이 분명한 ‘공개’ 그룹. 아마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아이들은 두 그룹의 차이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온라인에서의 프라이버시는 복잡한 문제이고 규칙도 자주 변하는데, 아무도 서비스 약관을 읽지 않는다. 게다가 그 약관도 종종 바뀐다. 나는 사람들이 결코 흔히 생각하듯이 온라인에서 무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용하는 온라인 서비스의 ‘설정’에 다 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걸 들여다보고 자신에게 맞게 고칠 시간을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에서도 발언의 온도와 맥락은 사뭇 엇갈린다. 코비아는 비관적이고, 위크리는 실용적이며, 플레머는 낙관적이다. 터클은 사회의 책임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반면, 앤더슨은 개개인의 책임에 무게를 둔다. 그런 면에서 공통의 해법을 찾기는 어렵지만, 개인 차원에서는 소셜 미디어가 지닌 위험성과 혜택 양쪽에 눈길을 주면서 적절한 균형 감각을 유지하는 한편, 사회적으로는 민주주의와 친밀성에 대해 갖는 프라이버시의 핵심적 가치를 온라인에서도 유지, 보장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바람직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