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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正名...이라고?

한국경제연구원 산하 사회통합센터라는 데에서 이런 제안을 내놓았다. 여기에 열거된 '종전 명칭'과, 그것을 대체할 용어로 제세된 '변경 제안'을 보면서, 착잡했다. 무엇인가가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 위선, 왜곡, 은폐, 가증 따위의 말들이, 마치 비누방울처럼 머릿속에서 보글보글 피어 올랐다. 요즘 직장에서 동료들과 자주 하는 은유법 'Put the cart before the horse'라는 말도 상기되었다. 말 앞에 수레를 놓으면 수레가 가나. 그러니 앞뒤 순서를 틀리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경제연구원이라는 데가 재벌, 아니, 이들 표현에 따르면 '대기업집단'의 산하 단체라는 점을 떠올리면 이 제안이 처음부터 떠안을 수밖에 없는 한계는 명백하다. 이 연구원의 산하 단체로 용어 변경을 제안하는 '사회통합센터'라는 기구 또한 그 성격이나 의도가 지극히 모호하다. 사회통합이라고? 어떤 면에서, 무엇을? 일종의 선전선동 기구?


하지만 이 제안 아닌 제안이 앞에 언급했듯이 부글부글 내 속을 뒤집어 놓는 더 큰 이유는 이 얄팍한 윤색 작업이, 구더기 들끓는 시궁창을 청소하거나, 왜 그런 시궁창이 생겼는지 고민해서 해법을 내놓을 생각은 하지 않은 채, 그 위에 화려한 비단 천을 덮어 잠시 가려보자는 심사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그저 겉으로 보이는 모양에만 급급한 채, 정작 그 속에 자리잡은 불균형과 부정의는 따져보려 하지 않는, 지적 게으름, 더 나아가 정치적 음모가 이들의 제안에서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말(경제 정의의 실현, 혹은 실현을 위한 진정한 노력) 앞에 수레(겉만 번지르르한 위장술)를 놓자는 심산 아닌가!


게다가, 이 제안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언필칭 '경제연구원'이라는 데 일하는 연구원이라는 자들이, 정작 경제적 지식이나 이해는 결핍된 채 정치적 술수와 의도만 노회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자본주의'라는 말이 부정적이라고? Capitalism이라는 단어가? 게다가 보수와 진보, 라는 말이 어떻게, 도대체 어떤 자들의 마음 속에 '부정적'으로 각인되어 있다는 말인가? 


이 제안에서 또 눈에 띄는 것은 시장점유율, 시장지배적 사업자, 시장지배자, 라는 말에서 시장이 다 소비자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우리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고 소비자들이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내 책임이 아니라 소비자들 - 너희 - 책임이다, 라고 뻔뻔하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보자. 재벌이 제빵 시장에 뛰어들면서 빵값, 제과 값을 절반으로 후려쳤다. 당연히 소비자들은 싼 쪽을 찾을 수밖에 없고, 자본력이 약한 중소 제빵업계는 얼마 못 버티고 다 고사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제빵 시장을 평정하면 다시 값을 원래 수준으로 회복해, 그간 손해 본 비용을 회수할 것이다. 이런 식의 술수와 구도는 과거에도 헤아릴 수 없이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수없이 재현될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니 무슨 정부 규제 기관이니가 다 무슨 소용인가 재벌 손에 놀아나면서 솜방망이나 휘두르는 게 엄연한 현실인데... 하지만 어쨌든 결과가 그렇게 흘렀으니까, 이런 경우도 '소비자 선택'이라는 거다. 


과당 경쟁을 시장 경쟁으로 바꾸자는 제안이나,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서 '책임'을 '공헌'으로 바꾸자는 말은 우습고 기막히다. 기업이 왜 존재하는지(이윤 추구), 그리고 누구에게 봉사, 아니 '공헌'하는지 (사주를 비롯한 주주, 사실 한국은 '주주'라는 '사주'가 더 타당한 게 현실이지만), 자문한다면, 이런 식의 어불성설적 제안은 내놓기 어렵다.


한국의 경제 정의는 이명박 정권, 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더욱 후퇴하고 악화하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 아니, 그저 일반인들이 느끼고 생각하는 의견[衆論]만이 아니라, 여러 경제 지표가 그것을 명명백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회 복지, 경제 정의와 관련된 통계 수치에서 OECD 하위권을 면치 못하는 엄연하고 냉혹한 경제 부정의의 현실은 외면한 채, 아니 도리어 그런 현실을 화려한 채색의 베일로 가려 미봉이나 해보자는 재벌 권력의 노력은, 실로 가증스럽다. 그러면서도 이런 노력이 결국은 재벌 옹호 정권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주류 언론 속으로 파고들 것이라는 예감 때문에 슬프고 절망스럽다.


노동자라는 말이 근로자로, 부정부패가 부조리로 희석되고 왜곡되어 쓰이던 박정희 정권의 비극이, 그 딸의 수중에서 되풀이되는 현실이 무섭다. 언어를 지배하는 자가 여론을 지배하고 세상을 지배한다. 말의 윤색, 언어의 왜곡을 통해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최면을 걸고, 자신들의 불의한 권력과 지배를 더욱 강화하려는 한국 재벌의 움직임이 실로 우려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