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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적 영감과 창의성을 살찌우는 가상 세계 놀이


Inventing Imaginary Worlds

한글 제목 (가제): 예술적 영감과 창의성을 살찌우는 가상 세계 놀이 – 아이들의 놀이부터 어른들의 예술 작품에 이르기까지

지은이: 미셸 루트-번스타인

출간일: 2014년 6월18일 (페이퍼백)

출판사: 로먼 & 리틀필드 출판사

종이책 분량: 284페이지


어린 시절 자신만의 세계, 상상 속의 세상을 만들어 그 안에서 놀아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혼자서, 혹은 몇몇 친구들과 어울려, 여러 채널을 통해 보고 들은 내용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화하고 변형해 상상 속의 세계를 만들고, 나라를 세우고, 그 구성원을 꾸미고, 낯설고 기묘한 동물을 창조하고, 그 안에 갈등 구조를 만들거나,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끌어낸다. 거의 누구나 한두 번쯤 겪었을 그런 경험, 혹은 활동을 미셸 루트-번스타인은 ‘가상 세계 놀이’(Worldplay)라고 부른다. 혹은 실제 존재하는 척 가장하는 ‘make-believe’의 세계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 가상 세계, 우리가 상상하며 즐겼던 그 세계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어른이 되면서, 상상 속의 세계는 서서히, 때로는 어느 날 갑자기 우리의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린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현상이었을까? 누구나 어른이 되면 자연스레 잊어버리고 밀쳐내게 되는, ‘유치한 애들 장난’에 불과했던 것일까? 


최근까지도, 상상 속의 세계를 만드는 놀이, 혹은 활동에 대한 학문적 천착은 거의 없었다. 그것이 어린이들의 지적 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일반적 인식은 분명히 존재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이나 잠재력을 가졌는지, 특히 어른이 된 다음에 어떤 흔적이나 파장으로 작용하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는 거의 없었다. 


역사학자이자 하이쿠 시인으로 미시건 주립대(랜싱)에서 창의력 연구원으로 활동하는 미셸 루트-번스타인(Michele Root-Bernstein)의 책 ‘예술적 영감과 창의성을 살찌우는 가상 세계 놀이’는 그러한 독특한 주제에 체계적으로, 또 치밀하면서도 꼼꼼하게 접근한 거의 최초의 저술이다. 종(역사적 사례 연구)과 횡(당대 관련 연구와 논문 연구)의 접근법을 적절히 배합해, 아마도 이 분야에서 가장 종합적이고 심층적인 연구 결과로 나왔다. 


우리는 어느새 ‘정보 시대’나 ‘지식 경제’ 사회가 아니라 ‘창의 사회’ (Creative Society)에 살고 있다고들 말한다. 경제의 건강과 건전성은 혁신에 달려 있고, 혁신은 창의성(creativity)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학부모, 교육자, 기업가, 정치인들은 어떻게 어린이들의 창의성을 높여 더 역동적인 사회적 혁신을 추동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 한 가지 해법으로 ‘가상 세계 놀이’(worldplay)를 제안한다. 어린이들로 하여금 상상 속의 세계 만들기를 장려하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어린이들이 막 지각을 갖기 시작할 무렵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 ‘상상 속의 세계 만들기’, 혹은 ‘가상 세계 놀이’는 그를 통해 발양한 상상력과 창의력으로부터 평생의 에너지를 끌어낸다. 


미셸 루트-번스타인은 이 책에서 역사 상의 여러 관련 사례를 검토하고, 현대의 전문가들을 인터뷰하고, 치밀한 양적 연구를 통해 어린 시절의 즉자적인 ‘가상 세계 놀이’가 그 사람의 창의적 잠재력을 계발하는 데 더없이 중요하며, 심지어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놀이를 전략적으로 잘 활용할 경우 예술과 문학은 물론 과학과 사회학 분야의 혁신을 불러일으키는 엔진으로 삼을 수 있음을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 그 안에서 노는 활동이, ‘창의 사회’에서 요구되는 다양한 기술과 지식을 자연스레 습득하게 도와주는 촉진제 구실을 한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그러나 현재의 아동 교육은 그러한 창의적 놀이의 효과를 도리어 떨어뜨리는 쪽으로 작용하는 경향이 크다고 지적한다. 어린 시절의 자유로운 놀이 시간은 사실상 실종되어 버렸다. 자유로운 놀이 속에서 상상력만으로 만들어냈던 세계는 잘 설계되었지만 천편일률적인 컴퓨터 게임에 의해 사라지고 말았다. 어른이 되면 상황은 더 나쁘다. 가상 세계 만들기는 유치한 시간 낭비나, 돈벌이와는 무관한 ‘쓸 데 없는 짓’ 정도로 치부되기 일쑤고, 기껏해야 판타지 소설의 그림이나 상상력 정도로 폄하되고 만다. 


이 책의 미덕 중 하나는 대단히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서’의 성격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다양하고 흥미로운 사례들을 마치 이야기하듯 적절히 버무림으로써 ‘읽는 재미’를 잘 배려했다는 점이다. 굳이 이 분야의 연구자가 아니더라도, 단지 ‘어떻게 하면 내 아이를 좀더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 사람으로 키울 수 있을까?’라는 소박하고 개인적인 의문을 가진 평범한 학부모들이라도 큰 어려움 없이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런 ‘목적 의식’ 없이, 그저 재미 삼아 읽어보려는 독자들에게도 이 책은 좋은 재료를 선사한다. 어린 시절, 그리고 개중에는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매혹적인 상상의 세계를 만들고, 가꾸고, 확장하고, 변형했던 유명 작가, 연구자, 과학자들의 사례가 풍부하게 소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이른바 ‘콜라보’의 진수를 ‘가상 세계 만들기’ 놀이에서 유감없이 보여준 소설가/시인 집안인 브론테 자매들을 비롯해, 아마도 가장 유명한 상상의 세계 중 하나로 꼽힐 ‘나니아’ 세계를 창조한 ‘나니아 연대기’의 C.S. 루이스, ‘상상 속 세계’의 최고봉으로 꼽힐 ‘중간세계’ (Middle Earth)를 창조해 장대한 서사시를 썼던 ‘반지의 제왕’의 J.R.R. 톨킨,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 시절의 상상 세계 놀이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보물섬’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등은 이 책에 소개된 일부 사례이다. 


요약하자면, 이 책은 그 표지의 모양새나 제목으로 판단하자면 딱딱하고 건조한 학술서 같지만 그에 담긴 내용은, 특히 어린 시절의 ‘가상 세계 만들기’ 놀이/활동이 창의력을 기르는 데 더없이 긴요하며, 따라서 그런 놀이/활동을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장려하고 프로그램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 풍부하게 담긴 여러 유명 작가, 과학자, 예술가들의 실제 사례들은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증거들이다.


이 책의 강점은 단지 주의와 주장, 그를 뒷받침하는 사례들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라는 부분까지 담아냈다는 점이다. ‘가상 세계 만들기’ 놀이가 중요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도 밝히고 있다시피, 이 책은 일반 독자부터 학부모,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교사, 연구자, 정책 입안자 등 다양한 층위의 독자를 겨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성은 다소 떨어진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학술적 성격이 물씬 풍기는 전문 용어와 도표, 숫자들도 대중의 접근을 막는 한 요소일 듯. 하지만 책이 가진 정보의 가치와 차별성 (uniqueness), 한국의 유아/어린이 교육 환경에 대한 실제 적용 가능성 등을 고려하면, 시장성은 의외로 클 수도 있으리라 판단한다. 풍부하게 삽입된 그림 자료들은, 특히 책의 학술서 이미지를 얼마간 희석시켜줄 만한 플러스.



상상의 세계는 우리 주위에 흘러 넘친다.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이다. 영화로, 드라마로, 판타지 소설이나 만화로, 온갖 ‘가상 세계’의 변주가 진행된다.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와 같이 우리가 수동적으로 즐기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직접 상상하는, 능동적으로 참여해 스스로 직조하는 상상의 세계가, 실상은 우리의 관계에, 일상의 비즈니스에 독특하면서도 효과적인 활력소로 작용할 수 있다는 발견은,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여러 수확 중 하나다. 어린 자녀를 가진 학부모라면, 아마도 ‘가상 세계 만들기’ 놀이/활동이 자녀의 창의력 배양에 엄청난 정(正)의 효과가 있다는 사실에 솔깃할 것이고, 그런 놀이/활동을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장려할 수 있는 방안이 담겨 있다는 사실에 더욱 큰 반가움을 느낄 것이다. 교육자, 정책 입안자, 심지어 베스트셀러 컴퓨터 게임을 구상하는 작가나 벤처 기업가들도 이 책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상상력, 특히 자기만의 가상 세계를 설계하고 구축하고 운영하는 놀이/활동이 가진 위력을 여러 층위로 체험하고, 그것을 실제 생활 속에서 적용해 보려는 사람들에게는, 그 직업이나 처한 환경과는 무관하게, 일정 수준의 영감과 단서를 제공할 수 있을 법한 흥미로운 책이다. 별점 (다섯 개 만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