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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얘기

雪国 밴쿠버


밤사이 눈이 내렸다. 적설량은 3 cm 안팎? 밴쿠버의 기준으로 보면 폭설이었다. 평소보다 늦잠을 자고 근처 정거장으로 나가 7시 버스를 기다렸다. 예정보다 5분쯤 늦게 온 버스는, 그러나 정거장 직전에서 210번이라고 적힌 신호등을 끄더니 그야말로 유유히, 그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을 무시하고 지나가 버리는 게 아닌가! 버스 안에 승객이 많았지만 더 이상 못태울 정도로 만원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고 비탈진 도로 - 명색이 '마운틴 하이웨이'다 -에 눈이 쌓여서 정차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눈은 이미 다 녹은 상태여서 미끄럽지도 위험해 보이지도 않았다. 대체 왜? 


"노쓰 밴쿠버 버스들이 저렇다니까요?" (Typical North Vancouver, eh?) 나처럼 그 버스를 기다리던 남자가 냉소적인 말투로 체념한 듯 말했다. 스트레스 받으며 더 버스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집에서 일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차피 어제 크리스마스 파티를 끝낸 사무실은 다음 주 연휴를 앞두고 파장 분위기일 터였다. 보스에게 출근 상황을 얘기하고 집에서 일하겠다고 이메일을 보냈더니 "밴쿠버 사람들이 본래 눈길 운전에 무지하다"라며 자신도 출근하는 데 애깨나 먹었다며 집에서 일하라고 선선히 답장을 보내왔다.


눈은 그 이후에 더욱 맹렬히 쏟아졌다. 여기 밴쿠버 맞아? 회사에 안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길이 더 큰 스트레스로 작용했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가까스로 영하 정도일 기온에서 쏟아지는 축축한 눈은 짜증스럽기보다 '럭셔리'처럼 느껴졌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선물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Let it snow, let it snow!


이 정도로 눈이 덮힐 줄 알았으면 넉가래를 처분하지 말고 가져올 걸 그랬다. 


버스 정류장까지의 거리는 약 300 m. 하지만 계속 비탈이다. 동준이를 픽업하는 스쿨버스 운전수가, 눈 때문에 너무 위험하다며 오지 않았다. 그래서 동준이 학교는 금요일부터 OFF. 


버스를 기다리는 중. 사진에서 보다시피 차도의 눈은 이미 다 녹았거나 치워진 상태다. 하지만 버스는 눈길에 파묻히기라도 한 것처럼 설설 기면서,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을 무시하고 유유히 지나갔다. 


다시 집으로 내려가는 길. 주변의 대다수 집들이 아기자기한 크리스마스 장식을 했다. 장식하지 않은 곳은 우리집을 비롯해 몇 집 되지 않는다. 


창문 너머 뒤뜰 풍경. 눈이 얼마나 소담하게 내렸는지 알 수 있다.


뒤뜰 풍경. 


집앞으로 난 길. 교통량이 거의 없는 탓인지 눈도 치워지지 않은 상태다. 그래서 더 푸짐한 설국 풍경이다.


그 길 풍경. 밴쿠버가 이렇게 설국으로 변하기도 하는구나, 새삼 놀랐다. 신선하기도 했다. 


내리는 눈발의 기세가 사진에 잘 잡혔다.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눈이 축축해서 눈사람 만들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눈을 동그랗게 유지하면서 굴리기는 쉽지 않았다.


아내도 신나게 눈을 굴리는 중. 볼품없는 내 눈사람과는 별개로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겠다고 했다. 


성준이가 특히 신났다. 눈사람을 만들겠다며 설레발을 쳐댔지만 작품은 뜻대로 나오지 않았다. 


성준이는 엄마가 만들고 있는 눈사람을 기웃거리며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자꾸 훼방만 놓았다. 


엄마의 눈사람 작업중 셋이 한데 모였다. 


드디어 완성된 엄마의 '작품'. 꼭 자기 얼굴처럼 동글동글, 빙긋 웃는 귀여운 눈사람이 나왔다. 눈은 성준이가 즐겨 마시는 요구르트 뚜껑으로 해결했다. 초록 모자 - 머리카락? - 는 바로 옆에 난 잎 몇 장으로 조달. 


귀여운 눈사람. 내 맘에 꼭 들었다. ㅎㅎ


아내는 에드먼튼이었다면 이렇게 눈이 내려도 너무 추워서 나올 엄두를 못냈거나, 설령 나왔더라도 눈이 건조해서 눈사람도 만들지 못했을 거라고 말했다. 그 눈밭에서 사진 한 장 찍었다.


이건 내가 만든 몸통 위에 성준이가 엄마의 도움을 받아 얼굴을 얹은 꼬마 눈사람이다. 눈은 역시 요구르트 뚜껑. 성준이가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얻어 쓰는 호사도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