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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대한 질문...그리고 '사는 기쁨'


한 지인이 '이장욱'이라는 시인을 내게 소개해 주었다. '겨울에 대한 질문'이라는 시다.


겨울에 대한 질문

 

함부로

겨울이야 오겠어?

내가 당신을 함부로

겨울이라고 부를 수 없듯이

어느 날 당신이 눈으로 내리거나

얼음이 되거나

영영 소식이 끊긴다 해도

 

함부로

겨울이야 오겠어?

사육되는 개가 조금씩 주인을 길들이고

무수한 별들이 인간의 운명을 감상하고

가로등이 점점이 우리의 행로를 결정한다 해도

 

겨울에는 겨울만이 가득한가?

밤에는 가득한 밤이?

우리는 영영 글자를 모르는 개가 되는 거야

다른 계절에 속한 별이 되는 거야

어느 새벽의 지하도에서는 소리를 지르다가

 

당신은 지금 어디서

혼자 겨울인가?

허공을 향해 함부로

무서운 질문을 던지고

어느덧 눈으로 내리다가 문득

소식이 끊기고


좋았다. 인터넷을 뒤져 그의 다른 시 몇 편도 감상했다. 기형도가 떠오르고 김기택이 떠올랐다. 탁월한 어휘 선택과 남다른 감수성으로 나를 감동시킨 시인들이다. 그렇다고 두 시인을 잘 안다는 뜻은 전혀 아니고, 그저 그 절륜한 어휘 선택이 그들을 떠오르게 했다는 말이다. '사육되는 개가 조금씩 주인을 길들이고 / 무수한 별들이 인간의 운명을 감상하고 / 가로등이 점점이 우리의 행로를 결정한다 해도' 같은 대목은, 시선을 바꾸거나 뒤집음으로써 전혀 새로운 시각을 획득하는, 이제는 제법 익숙하다고 여겨지기도 하는 방식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선한 쾌감을 주기에 충분한 표현이다.


지난 여름 한국에 갔다 오면서 내 돈 주고 산 책은 딱 한 권이다 (사고 싶은 책은 많았지만 돌아올 때 짐이 될까봐 살 수가 없었다). 황동규 선생의 '사는 기쁨'. 가슴에 와서 콕콕 박히는, 삶과 죽음에 대한 달관된 시선이 더없이 좋아서, 한국에 들어가기 전부터 꼭 사야겠다고 다짐해둔 책이었다 (전에도 이 시집이 정말 좋다고 쓴 적이 있다).


'삶은 너무나 부서지기 쉽고, 행복은 붙잡아 놓을 수 없다'라고 한, 삐삐를 탄생시킨 아스트리드 린드그랜의 말로 황동규 시인의 그 시집을 요약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황 시인의 시들은 그런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조바심보다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거기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찾는, 훨씬 더 긍정적이고 생기에 찬 정신을 보여준다. 

'사는 기쁨'에는 읽어도 읽어도 또 읽고 싶고, 친한 친구에게 몇 번이고 들려주고 싶은 시들이 많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여러 저패니메이션들은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라는, 주제랄까 절박함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내가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다. 사는 일, 살아야 하는 일의 긴박성, 유일성, 막중한 의미를 보여주기 때문에. 

하지만 황동규 시인의 '사는 기쁨'에는 그런 절박함을 놓아버린 사람의 편안함 - 때때로 서글프고 아련하지만 - 이 있다. 그는 이제 곧 지나가버리고 사라져버리고 바스라져버릴 것이라는 확실한 예감 때문에 새삼 더 빛나게 아름답고 소중한 삶의 자잘하고 소소한 단편적 장면들, 카메라 렌즈 속에 우연히 잡힌, 삶의 몇몇 풍경들을 놀라울 만큼 생생한 이미지로 포착해 보여준다. 아마도 나이 들면 더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은, 사소한 것들의 위중함, 순간적인 것들의 영원성, 깃털처럼 가벼워 보이는 것들의 막중한 무게 같은 것들이, '사는 기쁨'을 채우고 있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젊은 남녀가 수화(手話)를 하고 있었다.
남자는 턱 높이까지 올린 한 손 두 손 쉬지 않고 움직이고
여자는 두 손 마주 잡고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 발길 옮기려다, 아 여자 눈에 불빛이 담겨 있구나!
여자가 울고 있었다.
참을 수 없이 기쁜 표정 담긴 얼굴이
손 없이 수화하듯 울고 있었다.
나는 절름을 잊고 그들을 지나쳤어.

문득 떠오른 시 '발없이 걷듯'의 일부이다. '아 여자 눈에 불빛이 담겨 있구나!'에서, 그리고 '손 없이 수화하듯...'이라는 표현에서 더 깊은 감동을 맛본다. 정말 '사는 기쁨'이 느껴지는... 

이장욱의 시가 어떻다고 말하기에는, 읽어본 시가 워낙 없기 때문에,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 맨 앞에 걸어놓은 이미지는 인터넷에서 퍼온 것이다. 조만간 구해서, 찬찬히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