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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비늘

이사 스트레스

어딘가에 분명히 저장해 두었다. 하지만 찾을 수가 없다. 명색이 '정보 관리'(information management) 전문가라는 자가, 자기 정보도 제대로 못찾아 쩔쩔매는 꼴은 민망하면서도 우습다. 워낙 자주 이사를 다녀서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실상은 결코 그렇지 못하다. 늘 다시금 괴롭고, 번거롭고, 피곤하다. 마치 처음 느끼는 감정인 것처럼 낯설게, 그렇게 괴롭고, 번거롭고, 피곤하다. 


어머니는 날더러 "백말 띠라서 역마살이 끼었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역마살'(驛馬殺)은 결코 좋은 말이 아니다. 한자가 보여주듯 '살'(殺) 아닌가. 게다가 역마다. 역에 대기시켜놓은 말. 언제든 어디론가 떠나야만 하는 말에 사람을 견준 것이니 그 또한 썩 좋을 건 없다. 

새알밭에 도착한 이삿짐. 2009년 7월이다.


그런 운명이 본래부터 있는 것이라고 믿지는 않지만, 어쨌든 이사 다닐 일이 유난히 많았다. 심지어 군대에 가서도 해안선 경비와 내륙 훈련을 몇 개월씩 번갈아 맡아야 하는 보직이어서 서너 달마다 이동을 해야 했다. 내 짐을 옮기던 소대원들이 왜 이렇게 짐 - 주로 책 -이 많으냐고 불평하던 일이 아직도 기억난다. 제대한 뒤 취직해서도 자취집으로, 가정집 지하로, 허름한 아파트로 1, 2년마다 이사를 다녔다. 

캐나다로 이민을 와서도 이사 운 - '불운'이라고 해야 할까? -은 여전했다. 토론토대학에서 제공하는 기혼자 아파트에 들어가기 전까지 몇 개월을, 마침 당시 토론토에 사시던 둘째 처형 댁에서 기식해야 했고, 아파트가 너무 불편해 1년 반 만엔가 나와 집을 샀다가 다시 팔고 아파트로 들어가 3년여 동안 살다가 (그게 토론토에서는 한 곳에서 가장 오래 산 기록일 것이다), 다시 스카보로에 집을 샀다가, 통근하기가 너무 힘들어 다시 토론토 가까이 이사했다가... 그뿐인가, 나는 토론토로부터 1,000 km쯤 떨어진 와와에서 산림관으로 일하는 동안 1년 정도 그 궁벽한 산촌에서 혼자 살아야 했다 (벌써 이것만 몇 번이냐, 여섯 번? 일곱 번?).

그리고 2009년 알버타 주로 옮겨 왔다. 이민에 버금가는 큰 이주였다. 새 직장에서 절반 이상 보조해주기는 했지만 1천만 원 넘는 이사 비용만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 때 아내는, 이제 이곳에서 오래 살자, 어디로 이사가지 말고... 아무리 못해도 동준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여기에서 살자, 라고 내게, 또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하곤 했었다. 

그 다짐은, 물론 이행되지 못했다. 동준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면 앞으로 3년을 이곳에서 더 지내야 하지만, 우리는 다시 짐을 꾸리기로 했다. 한국에서 뿌리를 뽑아 캐나다로 이민 오던 것, 10년 가까이 정을 붙인 토론토를 떠나 알버타로 오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이번 이사 또한 우리 가족으로서는 크나큰 변화다. 격변이다. 한국이야 충청도로 가든 전라도로 가든 별로 바뀌는 게 없지만, 캐나다의 각 주들은 저마다 다른 제도와 정책을 갖고 있어서 거기에 적응하는 데만도 만만찮은 시간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온타리오 주, 다음에는 알버타 주, 이제는 브리티시 콜럼비아 (BC) 주다. 운전면허증, 의료서비스 카드, 자동차 등록증 따위가 다 바뀐다. 

어쩌면, 알버타 주로 오지 말고 진작에 BC주로 옮겼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간의 사연과 전후 맥락을 따져보면 그저 말로나 뒷북을 칠 수 있을 뿐이다. 더욱이 알버타에서의 생활이 나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토론토에서의 생활이 나쁜 것이 아니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 많은 이삿짐들...지금은 짐이 좀 줄었을까? 정말 행여나...다.


언젠가는 따뜻한 - '날씨 좋은'은 결코 아니지만 - BC로 이주해서, 그곳에서 노후를 보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늘 해왔다. 하지만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직업이 있어야 하고, 아이들 학교 문제, 주거 문제 등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다. 토론토에 살 때도 BC로의 이주를 몇 번이나 고려했지만 여러 문제가 걸렸었다. 특히 동준이의 교육 문제가 걸림돌이었다. 

지금 가는 게, 그런 걸림돌이 다 해소되었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해소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면에서는 바로 그게 이유이기도 하다. 어차피 어느 곳도 완벽하지 않다. 완벽할 수 없다. 교육 여건과 재정 지원이 가장 좋다는 알버타에서조차 문제는 많았다. 

우리에게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길고 긴 겨울을 거의 동면하듯 지내야 한다는 점이었다. 나야 미친 척하고 밖으로 나가 혹한 속 달리기를 한두 시간씩 했으니 그나마 낫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아이들까지 영하 20도, 30도의 엄동 속으로 끌고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금 과장해서 연중 6개월을 그저 집안에서 동면하듯 지내야 한다면, 아무리 지원이 좋은들 무슨 소용이냐, 정부 지원이 좀 못하더라도 사시사철 아이들을 밖으로 풀어놓을 수 있는 곳이 더 나은 것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겨울에 집에만 틀어박혀 산 것은 아니다. 훌륭한 시설을 갖춘 커뮤니티 센터도 있고, 즐겁게 시간을 보낼 만한 실내 시설도 적지 않다. 다만 전반적인 우리 마음을 얘기한 것이다. 날씨가 우라지게 추우면 일단 심신이 위축된다. 일삼아 커뮤니티 센터나 짐(gym)에 가기도 하지만 바깥에서 마음놓고 돌아다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제 이곳에서 지낼 시간이 2주 정도 남았다. 물론 집을 팔고, 이사하자면 그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내가 이곳에서 직장을 다니는 시간은 그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사무실의 동료들도 다 내가 떠난다는 것을 알고 있고, 이런저런 점심 약속도 많이 잡힌 상태다. 모두들 '축하한다', '부럽다'라고들 한다. 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나와 아내는 아직 그 축하와 부러움 섞인 시선을 제대로 흡수하고 이해할 처지가 못된다. 이사가 주는 스트레스, 특히 집을 팔아야 한다는, 그것도 가능한 한 빨리, 그러면서도 크게 손해 보지 않고 팔아야 한다는 스트레스 때문이다. 

소파 쿠션, 못쓰게 된 컴퓨터와 모니터, 부서진 의자 따위를 '에코스테이션'에 갖다 버렸다. 버리는 비용으로만 20달러가 나왔다.


한국에서 돌아온 이후 집 파는 문제 때문에 심난했다. 잡일의 9할 이상을 담당해야 하는 아내는 특히 더 그랬다. 다시 바뀐 시차 때문에 가뜩이나 피곤한 상태에서, '돼지우리'처럼 보이는 집안을 그럴듯해 보이도록 바꾸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집값 산정을 위해 부른 부동산 중개업자들도 도움이 못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부른 네 곳의 중개업자들 중 세 곳이 '겁주기' 전략을 구사했다. 시장이 어렵다는 둥, 너희가 원하는 가격대로는 팔 수 없다는 둥... 마음만 끌탕하다가 어제 저녁에야 겨우 사라소타(Sarasota)라는 업체와 집을 팔기로 계약했다. 'For Sale' 간판은 다음 주 목요일에나 올라간다. 그 때까지 집안의 가구 배치를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하는 이른바 '스테이징' (staging)을 이 업체에서 하게 된다 (무료다. 그게 끌렸다. 주변의 좋은 평가도 한몫했다). 


주말 동안에는 안쓰는 짐들을 싸서 차고에 쌓아둘 예정이다. 집이 넓어보이도록 하자면 일단 짐을 가능한 한 덜어내야 하는데, 짐을 쌓아놓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첫 번째 장소가 차고라는 중개업자의 조언 때문이었다. 차고가 차 두 대용인지 한 대 용인지만 따지지 그 안을 꼼꼼히 들여다보는 일은 없기 때문에 천장에 닿을 만큼 짐을 쌓아도 상관없다고 그는 말했다. 

지난 일주일간 에드먼튼의 날씨는 눈부시게 화창하다. 우리 일도 그처럼 화창하게 풀리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