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읽기

스웨덴의 여형사 아이린 후스 시리즈 - 'The Golden Calf'

스웨덴의 ‘여류’ 추리 소설가 헬렌 투르스텐의 민완 여형사 ‘아이린 후스’ 시리즈 그 다섯 번째, ‘The Golden Calf’ (소호 크라임, 340 페이지)를 읽었다 (다른 작품들에 대한 독후감은 여기). 


Golden Calf는 말 그대로 ‘금송아지’를 말하는데, 이는 돈이나 부(富)를 상징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숭배했던 우상을 뜻하기도 한다. 이 소설 속의 온갖 살인 사건들, 등장 인물들 간의 왜곡된 관계를 일관되게 묶어주는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형사치고는 너무나 평온하고 행복하기까지 한 스웨덴 예테보리 시경의 강력계 베테랑 아이린 후스 (현지 발음을 존중한다면 이렌느 후스?). 여기에서 ‘너무나’는 한국에서 남용되는 본을 따라 ‘꽤’ ‘매우’ ‘아주’ ‘퍽’ ‘되우’ 같은 부사 대신 쓴 것이 아니라 실제 뜻 그대로 ‘지나치다’는 의도로 썼다. 일본 무술인 주지츠(jiujitsu) 챔피언이자 십대의 쌍둥이 딸의 어머니이고, 예테보리에서 손꼽히는 레스토랑의 주방장을 남편으로 둔 후스는 직장에서는 동료들로부터 존경받고, 집에서는 저녁 때마다 남편의 진미 요리로 호사를 누리는 행복한 여자다. 쌍둥이 딸들은, 전편까지는 사춘기의 통과 의례로 이따금씩 속도 썩혔지만 이제는 다들 잘 커서 곧 각자의 삶을 찾아 분가하기 직전이다. 


예테보리의 강남 지역 – 청담동쯤에 견줄 수 있을까? –에 있는 저택,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호화 저택에서 한 남자가 살해된다. 예테보리에서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 재벌이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다른 두 남자가 같은 수법으로 머리에 총을 맞고 살해당한다. 세 남자는 모두 한 여자와 연결되어 있다. 레스토랑 재벌의 젊고 아름다운 아내 사나 캐글러-시더이다. 동성애 관계로 보이는 두 피살자 중 한 사람과 사나는 학교 동창으로, 닷컴 붐이 한창이던 시절 ph.com이라는 럭셔리 쇼핑몰 사이트를 공동 창업해 뭇 언론과 투자자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었다. 그러나 사이트는 제대로 뜨기도 전에 닷컴 붕괴와 함께 파산해 버렸고, 회사를 공동 창업했던 세 사람 – 나머지 한 사람도 몇 년째 실종 상태이다 – 은 뿔뿔이 흩어졌다. 


후스와 파트너 토미는 사나를 심문하지만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도무지 입을 열지 않는다. 본인의 생명까지 위협을 받게 된 상황에서도 사나는 묵묵부답이다. 증거가 없으니 용의자로 몰아 경찰서로 끌고 와 심문할 수도 없고, 걸핏하면 공황 장애나 신경쇠약 비슷한 증세로 정신줄을 놓아버리니 – 혹은 놓은 척해버리니 – 방법이 없다. 수사는 계속 겉돌고, 수사진이 받는 스트레스 지수도 더욱 높아만 간다. 


한편 아이린의 오랜 파트너이자 친구인 토미가 이상한 징후를 드러낸다. 수사팀원중 한 사람과 정분이 난 것일까? 역시 친구 사이인 토미의 아내에게 말을 해야 할까? 시간이 지나면서 사건에 대한 수사와 친구의 개인사에 개입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한데 뒤섞이면서 후스의 고민도 더욱 깊어진다. 


‘The Golden Calf’는 인간들의 주체할 수 없는 탐욕과, 그 탐욕에 눈먼 어리석음과 잔혹성, 비극을 닷컴 거품과 붕괴를 통해 보여준다. 이미 10여년 전의 과거사가 돼 버렸지만 20대 이상이라면 누구라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 그 탐욕과 광기가, 이 소설을 통해 재현된다. 닷컴 거품과 붕괴를 다룬 한 스웨덴 저널리스트의 책을 인용하는 형식으로 보여주는 사나의 ph.com 이야기는, 당시 실리콘밸리에서 너무나 흔하게 목도했던 황당무계한 돈놀음과 그 허무하고 극적인 몰락의 한 변주나 다름없다. 그래서 더욱 흥미롭고, 그래, 이랬었지, 라며 당시를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


북유럽발 추리 소설들을 읽을 때마다, 나는 그 지역에 대한 동경심과 더불어, 그 책들에서 거의 예외없이 묘사되는 겨울의 엄혹함에 대한 공감을 맛본다. 이스타드, 말뫼, 레이캬비크, 예테보리, 스톡홀름, 헬싱키, 코펜하겐…. 그리고 그 지역들에 대한 작가들의 꼼꼼하면서도 따뜻하고 인간적인 묘사를 읽으며 머리 속으로 상상해보는 행복을 누린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 구글과 위키피디아로 예테보리를 찾아보며 어떤 동네일까, 어떤 온도와 습도, 풍향, 풍경, 역사, 문화를 가진 곳일까 새삼 궁금해 했다. (왼쪽은 작가 헬렌 투르스텐, 2010년, 출처: 위키피디아)


소설의 속내와 그 진행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만이 없다. 후스의 개인사, 후스가 함께 일하는 다른 형사들의 이야기, 주변 풍경, 생활사 등을 훔쳐보는(?) 재미가 여간 쏠쏠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설 전체를 놓고 본다면 이 책은 전작들에 비해 밀도가 많이 떨어진다. 특히 후반부의 결말이 그렇다. 범인이 밝혀지는 과정이 퍽 실망스럽다. 그간 공들여 쌓아온 긴장감과 밀도가, 미국 요원의 등장과 함께 와르르 무너져버린다. 꼭 이런 식으로 결말을 만들어야 했을까? 그 허망한 결말 때문에 ‘추리’ 소설의 재미는 반감되었지만, 그래도 추리 ‘소설’의 재미는 죽지 않았다. 


자주 개탄해 온 사실이지만, 북미 문학계의 비영어 작품에 대한 홀대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온세계가 들썩이며 열광하고 칭찬하는 책이 아니면 제때 – 그러니까 원본이 출간된 지 1, 2년 안에 – 번역되어 소개되는 경우가 참 드물다. 아니, 늦게라도 그렇게 번역되는 것을 다행스러워 해야 할 지경이다. 이 소설만 해도 그렇다. 스웨덴어 출간일은 지금으로부터 9년 전인 2004년이다! 닷컴 붕괴의 지진이 북미 지역을 비롯해 세계를 휩쓴 게 언제인데 닷컴 붐을 등에 업은 피라미드 수법과 그에 대한 복수극을 이제사 소재로 삼았을까? …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이 책이 출간된 시기에 맞춰 보면 그야말로 시의 적절한 것이었다. 이 소설에 대한 내 별점은 ★★★☆ (다섯 개 만점). 


아래 비디오는 TV 시리즈로 만든 아이린 후스 시리즈 중 'The Golden Calf'의 예고편.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장면들로는 대충 감이 온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