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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릭스 올린의 단편집 'Signs and Wonders'

우연한 기회에 알릭스 올린(Alix Ohlin)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다. 과연 인신공격에 가까운 부정적 비평이 필요한가, 그렇게 책이 나쁘다면 차라리 그 책을 부정적으로 비평하고 공격할 지면에, 다른 좋은 책을 소개하는 게 낫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비평할 가치가 있는 책이 있고, 따라서 부정적 비평도 그만한 자리가 있어야 한다, 등등의 논란 속에서 만난 작가였다. 


시발점은 뉴욕타임스의 혹평이었다. 동시에 출간된 올린의 두 소설 'Inside'(장편)와 'Signs and Wonders'(단편집)를 동시에 다뤘는데, 이 평자 윌리엄 지랄디의 독후감이 정말 '지랄' 같았다. 'vitriolic'(독설로 가득찬)이라는 표현이 딱 맞을, 거의 인신 공격에 가까운 악평이었다. 그러자 다른 매체에서 '가뜩이나 도서 비평 지면이 줄어드는 마당에, 저런 악평을 굳이 실을 필요가 있느냐, 차라리 호평을 할 만한 다른 책으로 대체했어야 하지 않느냐'라는 반발이 나왔다. 


한편 그 논란과는 반대로, 다른 언론은 대체로 호평 쪽이었다. 캐나다의 양대 전국 일간지인 글로브앤메일내셔널포스트는 그 정치적 지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극찬에 가까운 평가를 내놓았다. 전자는 'Signs and Wonders'가 그 제목에 걸맞게 '기적' 같은 책이라고 탄성을 질렀고, 후자는 '일관된 탁월성'을 보여주는 단편집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올린이 캐나다 태생의 작가라는 점을 고려해도 대단한 찬사였다. 완전히 신뢰할 만한 지표는 결코 못되지만 아마존닷컴의 독자평도 다섯 개중 네 개다 (고작 여섯 명밖에 평을 하지 않았으니 신뢰도는 더 낫다고 해야겠지만...). 


어쨌든 올린의 단편집을 다 읽고 난 내 평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이다. 올린이라는 굉장한 작가를 알게 됐다는 가슴 두근거리는 흥분과 함께... 다른 책 'Inside'와 'Missing Person', 초기 단편집 'Babylon and other stories'도 꼭 읽어볼 생각이다. 


올린의 단편집을 읽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단어와 문장을 거의 완벽하게 장악하고,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구나 하는 경이로움이다. 전능에 가까운 문장력이라고 하면 지나칠까? 마치 물흐르는 것 같다. 편안하고 안락하다. 그래서 문장이 좋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그 문장이 전하는 이야기, 그 문장이 실어나르는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오롯이 침잠하게 만든다. 다루는 이야기는 이혼, 자살, 상실감, 소외감, 익사, 우연의 비극, 번 아웃(burn out)  등 대체로 어둡고 우울하고 비극적인 주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마음은 웬지 편안하고 위안 받는 느낌이다.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어가기 전에 대충 훑어보다가 이 문장에 꽂혔다. 


And, as always, he was right: her two stepchildren were just across the aisle, their blond heads islanded in headphones, watching the in-flight movie.


여객기 안에서, 헤드폰을 꽂고 영화에, TV에 열중하는 두 아이의 모습이 마치 손에 잡힐 듯 그려지지 않는가. 특히 저 'islanded'라는 단어 하나가 헤드폰을 통해 세상과 잠시 격절된 아이들의 모습을, 그와 동시에 요즘 세태의 한 씁쓸한 풍경을 겹쳐보이게 하지 않는가. 


올린의 단편들은 담담하고 잔잔하다. 가령 표제작의 캐슬린과 테렌스는 성공한 대학 교수들로 26년간 함께 살았지만 둘 사이에서 소통과 사랑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캐슬린은 남편을 증오하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는 못한다. 그러던 어느날 아내는 '우리 이혼하자'라고 말한다. 놀랍게도 테렌스는 선선하게 그러자고 대답한다. 남편도 오랫동안 이혼을 꿈꿔 왔던 것.  다른 동료 교수들 사이에 소문 나면 피곤해지니까 봄방학 때 조용히 헤어지자고 합의한다. 둘은 각자 솔로의 삶을 살 생각에 다시 행복해진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남편이 강도를 당해 뇌사 상태에 빠지고, 캐슬린은 평생 남편을 간호해야 할 운명에 떨어진다. 패배감과 절망감에 괴로워하던 캐슬린은 남편의 사고를 계기로 대학 동료인 플루어 메이슨과 우정을 쌓기 시작한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캐슬린이 가장 싫어하고 경멸했던 동료 교수가 바로 메이슨이었기 때문이다. 


올린은 저렇듯 그저그런 이야기, 별로 극적이지 않은 소재를 흥미진진하게 들려주는 재주를 가졌다. 캐슬린의 마음자락, 그 미묘한 풍경의 변화, 지형의 높낮이를 더없이 자연스럽게 그려낸다. 탁월한 문장력, 빼어난 이야기 직조술이 행복하게 손잡은 결과다.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을 법한 내용을 흔치 않은 것처럼, 마치 처음 듣는 내용처럼 느끼도록 재구축하는 기술 또한 발군이다. 16편의 단편들은, 그 짤막짤막한 길이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갖은 드라마와 클라이맥스, 놀라움을 감추고 있다. 나는 올린의 'Signs and Wonders'를 읽는 내내, 어느 단편을 읽는 중이냐와는 상관없이, '그래서, 그래서?' 하고 궁금해하며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려 조바심쳤다. 


단편집을 성공적으로 읽은 적은 거의 없다. 처음 한두 편 읽고 포기하거나, 몇 편만 가려 읽고 지나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돈 들릴로의 '앙헬 에스메랄다'(Angel Esmeralda)도, 거기에 실린 9편을 다 읽지 못하고 서너 편만 겨우 끝낸 뒤 돌려준 기억이 있다 (다시 보면 모두 읽을 수 있을까?).


적어도 나에게, 올린 단편집은 '단편집도 이렇게 재미있구나!' '이렇듯 짧은 내용 속에도 이렇듯 풍부한 메시지와 감정을 담을 수 있구나!' 하고 감탄하게 만든 첫 사례다. 앞으로는 장편뿐 아니라 단편집들에도 좀더 관심을 둬야겠다고 생각한다. 알릭스 올린, 정말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놀라운 작가다. 


* 제목 'Signs and Wonders'는 성서에 나오는 표현으로 한국의 성서 번역본에는 '이적과 기사'라고 되어 있다. '기적'쯤으로 표현해도 되겠다. 아래 유튜브 비디오는 'Signs and Wonders'를 소개하는 알릭스 올린의 비디오. 올린은 캐나다 몬트리올 태생으로 현재 미국 필라델피아의 명문 라파예트 칼리지의 영문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