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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로빈슨의 앨런 뱅크스 시리즈 #19 <Bad Boy>

범죄 추리 소설 계에는 유난히 '시리즈'가 많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셜록 홈즈와 에르퀼 푸아로가 있고, 가깝게는 해리 보쉬, 쿠르트 발란더, 존 리버스, 콘라드 세저, 클레어 퍼거슨/ 러스 밴 얼스타인, 테스 모나간, 해리 홀, 조 올라클린, 알렉스 크로스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때로는 각권마다 별도의 등장 인물과 사건으로 마무리 짓는 소설도 좋지만,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 환경, 배경이 탄탄하고 튼실하게 구성된 경우에는 시리즈로 전개되는 것이 더 매력적이다. 억지춘향 격으로 말도 안되는 플롯을 만드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만 않는다면, 이런 시리즈물이야말로 장기적인 성공을 약속하는 열쇠다. 


영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집필 활동을 벌이는 피터 로빈슨의 앨런 뱅크스 시리즈는 해리 보쉬, 쿠르트 발란더 시리즈와 더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형사물이다. 무엇보다 핵심 인물인 뱅크스와 그 동료이자 부하이고 한때는 애인이기도 했던 애니 캐봇이 대단히 매력적으로 묘사되고, 따라서 독자들이 공감하고 감정을 이입하기 쉽다. 그의 관할 지역이 인구가 충분히 많고 요크, 리즈 등 주요 도시와도 인접한 이스트베일 (모두 요크셔 지방에 들어간다)이라는 점도 다종다양한 사건과 플롯을 구성하기에 그만이다. 


시리즈물의 주인공이 매력적이기 위해 꼭 슈퍼맨 같은 능력을 발휘한다거나 뭇 여성(혹은 남성)의 혼을 빼놓을 정도의 외모를 갖춰야 할 필요는 없다. 아니, 그러면 도리어 현실성을 까먹기 십상이다. 그보다는 인간적이어야 한다. 장점뿐 아니라 단점도 보여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은 선하고 정의감에 불타야 한다. 투철한 프로 정신을 지녀야 한다. 장점과 단점을 보일 때, 후자가 너무 부각되어서도 곤란하다.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후자가 너무 큰 인상을 남겨 주인공은 물론이고 작품 자체에 대한 매력을 잃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내 경우는 드니스 미나, 카린 슬로터, 그리고 레이프 G W 페르손 (Leif G W Persson)의 몇몇 소설이 그랬다. 앨런 뱅크스는 그런 줄타기를 기막히게 잘한 경우다. 


그도 해리 보쉬나 쿠르트 발란더의 경우처럼 별로 바람직한 가장 상은 아니다. 하긴 살인 사건을 밤낮으로 추적하고 수사하는 사람이 충실한 가장이기까지 하다면 그게 도리어 기이할 터이다. 그도 보쉬와 발란더처럼 이혼을 했다. 전처와의 사이에서 아들과 딸을 두었고, 이후 여러 여성들과 짧거나 상대적으로 긴 교제를 하기도 했지만 재혼은 안/못했다. 클래식 음악, 특히 오페라를 좋아하고, 올드 재즈와 블루스도 즐겨 듣는다. 탁월한 수사력으로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해결해 경감(Detective Chief Inspector, DCI) 자리까지 올랐지만 그 상관들에게는 여전히 다루기 힘든 'bad boy'로 낙인 찍혀 있다 (하여 이 소설의 제목도 다시 중의적이다). 


이번 사건에는 뱅크스뿐 아니라 그의 하나뿐인 딸 트레이시가 연루된다. 그것도 지나치게 깊숙이. 비극적인 사건은 뱅크스가 실로 오랜만에 휴가를 얻어 미국 서부를 여행하는 사이에 발생한다. 딸이 권총을 소지했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한 어머니가, 옛 이웃이었던 뱅크스에게 도움을 청하려 경찰서를 찾아오고, 사안을 애니 캐봇이 맡는다. 캐봇은 제보 내용을 경정인 저베이스에게 보고하고, 다시 저베이스는 불법 총기 문제를 담당하는 부서로 다시 이첩하고, 하여 마치 테러 진압부대의 작전 같은 사태로 진전되어, 뜻하지 않은 비극으로 확대된다.


한편 문제의 권총은 딸이 남자 친구와 다툰 뒤 홧김에 몰래 훔친 것이었다. 대학 룸메이트인 트레이시 - 앨런 뱅크스의 딸 -가 바에서 자신의 남자 친구와 키스하는 것에 질투와 분노를 느껴 벌어진 사건이었다. 에린의 남자 친구이자 트레이시가 속으로 흠모하는 재프 (Jaff)는 백인-인도계 혼혈의 미남자에다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이고 달변이며, 불분명한 직업과 달리 부촌 아파트에 살면서 돈을 흥청망청 쓰는 매력남이지만 그 본질은 잔악무도한 'bad boy'다. 물론 여자 관계도 더없이 복잡하다. 늘 자신감에 넘치는 모습이던 그는, 그러나 자신의 권총이 없어진 것을 알자 크게 당황하면서 서둘러 짐을 꾸린다. 경찰이 들이닥치기 전에 빨리 도망쳐야 한다는 것. 대체 왜 그럴까? 권총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 것일까? 


그에게 환상을 품었던 트레이시는 이것이 기회다 싶어 자기 아버지 - 앨런 뱅크스 -의 숲속 별장으로 숨자고 제안한다. 아버지가 다음 주까지 휴가에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므로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설득전까지 펼치면서. 물론 트레이시는 자기 아버지의 직업을 밝히지 않았고,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으로 이름도 프란체스카로 바꿔 살던 참이었다.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자주 궁금해 했다. 대체 왜 여자들은 불량배, 깡패, 반항아 들에 끌릴까? 혹시 많은 여자들은 태생적으로 '구원자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저 '예쁘냐?'만을 유일한 잣대로 삼는 남자들의 '외모 콤플렉스'처럼 말이다. 또 하나 분명한 것은 동성끼리는 상대의 본질을 잘 파악하지만 이성끼리는 종종 '콩깎지'가 씌인다는 점이다.


사건은 점차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재프가 마약 밀매범이라는 점을 깨닫고, 자신이 언제든 처분 가능한 수단일 뿐이며, 그가 불법 여권을 구해 해외로 도피할 무렵에는 처참한 죽임을 당하거나 매춘부로 해외 송출되어 버릴 것이라는 점을 트레이시가 깨달았을 때는, 더욱이 애니 캐봇이 재프의 총에 맞아 중태에 빠지는 사태까지 발생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너무 늦어버린 마당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무렵 뱅크스가 영국으로 돌아온다. 


모든 시리즈물이 다 그렇지만 특히 결말이 어떻게 될까, 누가 범인일까, 독자의 궁금증을 계속 유지하면서 이야기의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해야 하는 추리 범죄물이 매번 높은 수준의 작품성과 완성도를 갖기는 대단히 어렵다. 저마다 천차만별인 독자의 취향을 따로 떼어놓더라도, 작품마다에서 일정 수준의 흥미와 긴장감을 갖기란 지극히 어려울 게 분명하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피터 로빈슨의 앨런 뱅크스 시리즈는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시리즈를 다 읽어보지 못했으니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내가 읽어 본 뱅크스 시리즈는 다 '수작'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Aftermath>(2001, 독후감은 여기), <Friend of the Devil> (2007), <All The Colours Of Darkness> (2008) 모두 좋았다. '좋았다'라는 것은 추리물로서의 기본 요건인 '도대체 누가 범죄를 저질렀을까?'라는 의문을 거의 말미까지 잘 감춰두었다는 것, 혹은 전반부에서 이미 범인이 누구인지 드러냈더라도 그가 왜 그런 범행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끌어내어 독자의 관심을 끝까지 잘 붙잡아두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단순히 범죄의 특이함이나 엽기성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런 범죄를 가능케 한 주변 정황이나 사회적 환경까지 자연스럽게 드러내어 일반화해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냄으로써, 범죄 소설의 범주를 넘어 사회 고발 소설, 더 나아가 번듯한 본격 문학작품의 경지에 접근 (혹은 도달)했다는 뜻이다.


<Bad Boy>에 나오는 사람들은 로빈슨이 만들어낸 가상 인물이라기보다 영국 (혹은 미국이나 캐나다) 어딘가 실재할 것 같은 현실감을 생생하게 드러내 주었다. 그래서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화해하고 때로는 영영 멀어져 버리는 그들의 관계에서 작지 않은 무게감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애니 캐봇과 뱅크스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할지 궁금했고,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성공 확률이 높지 않은 중대 수술을 앞둔 상황으로 소설이 끝나 다음 내용이 기다려졌다. 올해 8월께 출간되는 <Watching the Dark> (2012)에서 다시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새알밭 도서관에 들어가 보니 '주문했음'이라고 돼 있었다. 찜해 두었다. <Bad Boy>의 별점은 다섯 개 중 네 개 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