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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사이클링

세상은 달리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캐나다와 미국 사이에 놓여 있는 빙하 국립공원 꼭대기란다. 앨버타주에 있는 공원이니 일삼아 시도해 볼 수도 있을듯. ^^ 출처: 러너스월드.

무엇인가에 빠지면 적어도 그것에 푹 빠져 있는 동안은 주변 세상을 온통 그것을 중심으로 보게 마련이다. 그 관심사가 일종의 렌즈나 필터, 혹은 기준점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음악을 들으면서는 늘 말러를 생각하게 되고, 캐나다나 미국의 정치판 소식을 접하면서는 한국의 비슷한 상황을 떠올리며, 다른 도시의 축제나 이벤트 소식을 들으면 내가 사는 새알밭과 이웃 에드먼튼을 거기에 견줘 보게 된다. 


이 달엔, 다음 달엔 어디를 가볼까, 무슨 일을 해볼까, 어떤 휴가를 즐겨볼까 생각할 때, 나는 먼저 '달리기'의 렌즈를 낀다. 찾아가려는 동네에는 어떤 트레일이 있을까, 혹시 휴가 간 동안 무슨 달리기 행사나 대회가 있지는 않을까, 그 동네나 근처에 달리기 좋은 길이나 환경이 조성되어 있을까...?


올해 일정은 이미 다 잡혔다. 그러다 보니 마음은 벌써 내년으로 달려간다. 아무리 우리 삶이 '마음은 미래를 사는 것'이라지만 좀 지나치게 앞서가는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내년 8월에 한 달 동안 한국에 들어가자, 라고 아내가 제안했을 때, 내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그러면 홋카이도 마라톤을 뛸 수 있겠네!'였다. 내년 일정을 찾아보니 8월25일(물론 일요일)이다. "어, 그러면 그거 뛰고 며칠 쉬다 돌아오면 되겠네"라고 아내도 맞장구를 친다. 

밴쿠버 스탠리 공원. 공원을 일주하는 코스는 약 9마일쯤 되는데, 바다와 밴쿠버 다운타운의 고층빌딩을 바라보며 뛸 수 있어서 여간 멋지지 않다. 출처: 러너스월드.


큰 처남이 사시는 LA도 마찬가지. 지난 몇 년간 이제나 가보나 저제나 가보다 재기만 했다. 올해는 구스타보 두다멜이 LA필하모닉을 데리고 말러 사이클을 연주하던 2월에 짬을 내볼까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재정적 어려움도 한몫 했고, LA까지 가서 가족 다 제쳐두고 혼자 연주회를 보는 것도 별로 좋아보이지 않았다. 내년쯤? 그렇게 마음 먹고 또 뒤적뒤적 해보니 LA 마라톤이 3월이다 하하. "하프 마라톤이나 마라톤도 뛰어볼 겸 3월에 가볼까?" 하고 물으니 아내도 "그거 괜찮은 생각 같네. 좀더 생각해 보자고" 한다.


꼭 하프 마라톤이나 마라톤일 필요는 없다. 5k도 있고 10k도 있다 (울트라 마라톤은 아직 언감생심이지만). 어느 동네를 막론하고 달리기 대회가 없는 곳은 거의 없다. 아내가 가보고 싶어 하는 보스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거기에서 멀지 않은 케이프 코드, 뉴 잉글랜드 지방에도 크고 작은 달리기 대회가 많다. 서부만 해도 시애틀, 타코마, 포틀랜드, 유진, 샌프란시스코, 샌디에이고, 피닉스, 산타페 등 웬만큼 그 이름이 익숙한 동네는 다 한두 개씩 달리기 대회를 가지고 있다. 유럽도 마찬가지. 에든버러, 더블린, 마드리드, 리스본...우리가 여행해 보고 싶은 도시에는 다 흥미로운 대회가 있다. 시기도 여행하기 딱 좋은 계절이다. 


배경으로 선 시어즈 타워로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시카고다. 하지만 겨울에는 퍽이나 추울듯...게다가 '바람의 도시' (Windy City) 아닌가! 출처: 러너스월드.


꼭 달리기에 빠져서만이 아니다. 달리기 대회에 나가는 것보다 더 확실히 그 동네를 구경하고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달리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차들로 꽉꽉 들어찬 다운타운의 대로를 언제 달려 보겠는가? 가령 LA 마라톤은 LA 다저스의 경기장인 다저 스타디움에서 출발해 대로를 따라 바닷가로 내처 달린다. 캘리포니아 국제 마라톤은 폴섬이라는 동네에서 출발해 캘리포니아 주도인 새크라멘토의 시청 청사 앞에서 막을 내린다. 그 도시의 심장부를 통과하는 것은 물론이다. 달리기가 힘들다면 걷기도 상관없다. 100달러 안팎의 참가비를 내고, 앞에 번호표 달고, 대로를 걸으면서 그 도시, 마을의 진수를 차근차근 감상하는 것이다. 그뿐인가, 길가에 늘어선 사람들의 함성, 록 밴드의 응원 연주 등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면, 하여 그것을 자꾸 파게 되면, 그것을 둘러싼, 또는 그것과 연관된, 또다른 신세계를 만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신세계는 대체로 내 머릿속에서 막연히 상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설령 지레 짐작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더라도, 그 색깔, 질감, 체온은 사뭇 다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다. 이를 백견이 불여일험[체험]이라고 바꿔도 과히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요즘 내 세상은 달리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것이 싫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