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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카라얀, '유령'되어 돌아오다 | 죽은지 10년 넘었지만 '그 명성 그대로' | NEWS+ 1999년 8워29일치
 

매년 여름이면 갖가지 유령들이 ‘납량’(納凉)의 사명을 띠고 화려하게 복귀한다. TV와 라디오, 영화, 잡지, 단행본 등 온갖 매체에서 유령들이 보여주는 활약은 자못 눈부시다.

올 여름에는 음반계가 여기에 가세했다. 꼭 여름 한 철만을 겨냥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꽉 막힌 클래식음반 시장에 돌파구를 마련할 요량으로 유령들을 다시 불러낸 것만은 사실이다.

그 중 가장 인기있는 유령은 역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다. 그의 인기는 식지도 않는지, 타계한 지 10년이 넘었어도 여전히 클래식 음반계의 제왕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살아있는 어떤 음악가들도 이미 죽어버린 카라얀을 당하지 못한다.

음반계가 너도나도 카라얀을 다시 불러오는 것은 따라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카라얀이 가장 오랫동안 계약관계를 유지했던 도이체그라모폰(DG)뿐 아니라 EMI, 데카, BMG 등도 앞다퉈 카라얀 음반을 냈다. 카라얀이 얼마나 정력적으로 음반을 취입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 중 클래식 마니아들을 가장 강하게 끌어당기는 것은 DG가 그의 사망 10주기에 맞춰 선보인 ‘카라얀 에디션-100편의 걸작들’이다. 기왕에 나온 그의 음반들만도 헤아리기조차 어려우니 잔뜩 겹칠 만도 한데, 실제로는 별로 그렇지 않다는 점이 우선 놀랍다. 같은 작품을 몇 차례씩 녹음한 그의 ‘녹음벽(癖)’ 덕택일 터이다. 연주 기량과 음질 양쪽에서 매우 만족스러울 뿐 아니라 카라얀의 미망인 엘리어트 폰 카라얀이 그린 음반표지를 감상하는 가외의 즐거움까지 누릴 수 있다.

꽉 막힌 클래식 음반시장에 “숨통”

EMI가 선보인 ‘세기의 위대한 녹음들’ 시리즈 중 카라얀 편은 오페라 마니아들에게 특히 매력적일 듯한 내용이다. 카라얀이 당대의 명가수들을 끌어모아 녹음한 일련의 오페라 음반들은 아직도 그 분야의 전범(典範)처럼 취급받고 있기 때문이다. 모차르트의 ‘코지 판 투테’ ‘피가로의 결혼’ ‘마술피리’를 비롯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낙소스섬의 아리아드네’ ‘살로메’, 요한 슈트라우스의 ‘박쥐남작’, 드뷔시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등 그야말로 주옥같은 오페라 녹음이 더욱 향상된 음질로 팬들을 유혹한다.

BMG에서 최근 발매한 ‘빈국립오페라’ 시리즈도 오페라 마니아라면 놓치기 어려운 명작이다. 카라얀이 빈국립오페라단을 이끌고 만들어낸 실황 음반들인데, 피에로 카푸칠리, 한스 호터, 군둘라 야노비츠, 힐데 귀덴 등 당대의 명가수들이 펼치는 열연을 들을 수 있다.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2CD), 바그너의 ‘파르지팔’(4CD), 슈트라우스의 ‘박쥐남작’(3CD) 등 3편이 한 세트로 묶여 있다.

데카는 옛 명반들을 되살리면서 아예 ‘전설’(Legends)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모든 음반의 왼쪽 위 귀퉁이에 ‘데카의 전설-전설적인 명연들’이라고 쓰인 주황색 도장이 찍혀 있다. 향수를 한껏 돋울 요량으로 표지의 음악가들 사진을 모두 흑백으로 처리한 것, 릴테이프 모양을 그대로 본뜬 CD의 디자인도 매력적이다.

그러나 데카 시리즈의 진짜 매력은 놀라울 만큼 풍부하고 따뜻한 음질이다. 50년대에 녹음된 것조차도 마치 몇달 전에 최신 시설의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것처럼 선명하고 풍요롭다.

음반표지 오른쪽 아래 모서리에 써놓은 ‘96KHz 24-bit 슈퍼 디지털 트랜스퍼’가 바로 그 비결이다.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 신호로 바꾸는 과정에서 1초에 9만6000번(96KHz) 신호를 채취했으며, 이를 24비트 음원으로 만든 뒤 양 극단의 음원을 덜어내 다시 16비트로 옮겼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원음의 향기를 거의 완벽하게 살렸다는 자랑이다.

"역시 카라얀" 변치 않는 부동의 1위 
英 음악월간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휘자'선정

영국에서 발행되는 음악 월간지 ‘클래식CD’ 8월호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휘자’ 100명을 뽑아 발표했다. 1위는 ‘예상대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89). 20세기 지휘사에서, 특히 음반사에서 카라얀을 앞설 사람이 누가 있으랴.

음악 마니아들 사이에서 ‘거장’으로 추앙받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3위·1886~1954), 오토 클렘페러(5위·1885~1973), 아르투로 토스카니니(6위·1867~1957), 브루노 발터(7위·1876~1963), 레너드 번스타인(8위·1918~90), 프리츠 라이너(9위·1888~1963) 등도 10위권 안에 들어 그들의 변치않는 권위를 과시했다.

그러나 이번 선정은 지나치게 영국 중심적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존 바비롤리(1899~1970)와 토머스 비첨(1879~1961)이 각각 2위, 4위에 오른 것까지는 이해한다고 해도 100명 중 무려 23명이 영국인이라는 사실은 선정 과정의 공정성마저 의심하게 만든다.

현역 지휘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얼마전 차기 베를린필 상임지휘자로 내정된 사이먼 래틀이 16위, 콜린 데이비스가 17위로 현역 지휘자들 중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실상 그들보다 훨씬 더 빛나는 업적을 쌓았으면서도 뒤로 밀린 피에르 불레즈(20위), 발레리 게르기에프(25위), 베르나르트 하이팅크(32위), 게오르그 솔티(35위) 등은 공교롭게도 모두 비영국인들이다. 이쯤 되면 영국의 국수주의도 참 대단하다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