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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웬 메조 소프라노?

'카운터 테너' 메라·숄·아사와 인기…여성같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팬 사로잡아 | NEWS+ 1999년 7월

하얗게 눈쌓인 언덕. 간밤에 내린 폭설로 사슴이 제 걸음을 못걷고 자꾸만 쓰러진다. 한 남자가 사슴에게 다가가 그를 끌어안고 쓰다듬으며 기운을 북돋운다.

한 휴대폰 회사의 광고내용이다. 하얗고 차가운 눈의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그 광고의 분위기는 더없이 따뜻한데, 무엇보다 배경음악의 남다른 매력을 그 이유로 꼽지 않을 수 없다. 높고 길게, 그리고 무엇보다 신비롭게 흐르는 그 음악은 '헨델'의 오페라 '세르세'(Serse) 중에 나오는 '나무그늘 아래서'(Ombra mai fu)라는 노래다. 세르세왕이 풍요로운 그늘을 드리운 뜰의 나무를 보며 "너만큼 정답고 달콤한 그늘을 드리운 나무는 없도다"라고 감탄하는 내용이다.

목소리만 들으면 여성으로 착각

흥미로운 것은, 이처럼 눈[雪]과 전혀 무관한 내용의 노래인데도 눈 풍경과 더없이 잘 어울린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오'(O) 하고 길게 뽑으며 시작되는 노래의 신비롭고 아득한 느낌에 힘입은 바 크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그 목소리는 가늘고 높으며, 눈의 이미지만큼이나 청정하다. 그러면서도 흠 잡을 데 없는 균질감과 균형감각을 느끼게 한다. 목소리로부터 아련한 슬픔의 이미지가 언뜻언뜻 묻어나는 것도 매력이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요시카즈 메라(28). 카운터테너다. 일본의 정격연주가 마사아키 스즈키와 함께 바흐의 칸타타 전집을 녹음하면서 전성기를 맞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데뷔 음반 '로망스'로 만만찮은 팬을 얻었다. 깊이에서 다소 아쉬움이 남기도 하지만 소년의 맑은 목소리를 연상시키는 중성적 매력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최근 '바로크 아리아집'(비스)과 '프레셔스'(킹)가 국내에 수입됐다.

우리에게 카운터테너의 이미지는 종종 '귀곡성'(鬼哭聲)을 연상케 했던 영화 '파리넬리'의 주인공 모습과 겹친다. 남성이면서 여성의 음역을 자유자재로 소화하던 거세(去勢) 가수.

그러나 오늘날의 카운터테너는 그들처럼 비극적이지 않다. 카스트라토가 비인간적인 방식을 통해 변성기 이전의 목소리를 유지시킨 데 반해 카운터테너는 발성의 묘(妙)를 통해 여성 음역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느낌은 묘하다. 가수의 이름이나 성별을 모른 채 들으면 영락없는 여성의 목소리지만 거기에 깃들인 음영은 좀더 짙고, 때때로 구슬프기까지 하다. 특히 요시카즈 메라에서 그러하다.

현역 카운터테너 중 최고의 인기와 지명도를 자랑하는 안드레아스 숄은 조금 다르다. 최근 한 자동차 광고에 그의 자작곡 '백합처럼 하얀'(White as lilies)이 소개됨으로써 더욱 유명해진 숄의 목소리는 '화창하다'. 감상적(感傷的)이지 않다는 말이다. 또한 중성적인 그의 목소리는 바로크 오페라에 더없이 이상적으로 부합하는데 기교나 표현력, 깊이에서도 나무랄 데가 없다. '아르모니아 문디 프랑스' 레이블로 비발디의 '스타바트 마테르', '옴 브라 마이 푸'(헨델의 오페라 아리아 모음), '독일 바로크 가곡', '영국 민요' 등 여러 장의 바로크 음반을 냈으며, 얼마전 메이저 음반사인 데카로 자리를 옮겨 헨델 글룩 모차르트 등의 오페라 아리아 모음집인 '영웅들'을 선보였다.

일본 미야자키현 태생인 메라가 아시아를, 독일 태생인 숄이 유럽을 대표한다면 미국에는 브라이언 아사와가 있다. 언뜻 진부하고 억지스러운 표현처럼 들리지만 이들의 성격이나 음색, 취향을 견주어 보면 어느 정도 출신지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아사와는 메라나 숄과 비교할 때 매우 신세대적이고 파격적이다. 셋 모두 20대인데도 그렇다. 이들 중 메라와 숄은 바로크 정통음악에 대해 강력한 친화력을 보여준다. 메라는 마사아키 스즈키와 함께 바흐의 칸타타 전집을 녹음 중이며, 숄은 비발디 칼다라 헨델 등의 아리아를 녹음해 그라모폰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

카운터 테너란? 

남성의 가장 높은 음역. 흔히 '남성 알토'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여성의 메조소프라노 음역에 더 가깝다. 변성기 이전에 거세, 여성의 목소리를 냈던 16, 17세기의 '카스트라토'(Castrato)와 달리 이들은 가성(假聲·팔세토)을 써서 머리의 공명을 끌어낸다. 여성의 음악 참여가 금기시되던 르네상스기로부터 18세기 초반까지 주로 교회음악과 오페라에서 여성 음역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