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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티비즘 - 해커와 운동가가 인터넷서 만났다

핵티비즘 확산…정부 기업 웹사이트에 침입, 정치-사회운동 벌여 | NEWS+ 1998년 11월19일치
‘해커’(Hacker)와 ‘적극적 행동주의’(Activism)의 합성어. 뉴욕타임스는 종래의 정치-사회 운동가들이 인터넷의 대중화와 더불어 그들의 활동영역을 사이버스페이스로 확장한 결과라고 본다. 한편 cDc라는 해커그룹은 핵티비즘이 정치-사회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벌이는 다양한 온라인 활동방식, 즉 해킹, 프리킹 혹은 새로운 네트워크 기술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중국의 인권기구가 새로운 웹사이트를 발표한 다음날인 10월27일, 중국 당국의 공식적인 인권 기록과 논평이 다음과 같은 해커들의 비난 문건으로 뒤바뀌었다. ‘중국 국민은 인권은 고사하고 어떤 권리도 갖고 있지 못하다. 미국은 그런 현실을 뻔히 알면서도 어떻게 중국과 무역을 하고 최혜국 대우를 할 수 있는가?’

10월초, 또다른 컴퓨터 침입자들이 인도 정부의 한 웹사이트에 침입했다. 이들은 초기화면에 ‘카슈미르를 구하라’는 격문을 써넣고, 인도 군인들에 의해 살해된 카슈미르인들의 사진을 띄웠다. 카슈미르는 인도와 파키스탄, 분리주의 그룹 등이 서로 소유권을 다투는 지역. 그 사진들 위로 ‘학살’ ‘탈법적인 처형’ 등의 문구가 오버랩됐다.

9월, 포르투갈의 해커들이 인도네시아 정부의 컴퓨터에 침입했다. 이들은 무려 40대의 서버를 장악한 뒤 ‘동티모르를 독립시키라’라는 슬로건을 띄웠다. 동티모르 주민들에 대한 인도네시아 정부의 인권유린 사례들을 하이퍼링크로 연결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해커(Hacker)와 정치-사회적 행동(Activism)의 결합, 곧 ‘핵티비즘’(Hacktivism)이 인터넷의 새로운 흐름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미국의 유력 일간지 뉴욕타임스는 10월31일 다양한 정치-사회 운동이 인터넷의 영역으로 편입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가 핵티비즘의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한 사람은 리카르도 도밍게즈(39)와 스테펀 레이(37)라는 두 정치운동가. 멕시코 반정부군인 자파티스타(Zapatista)의 열렬한 후원자인 이들은 그동안 집회에 참여하거나 선전물을 돌리는 것, 정치구호를 외치는 일 등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밝혀왔다.

최근 이들은 전술을 획기적으로 바꿨다. ‘가상 연좌데모장’(Virtual Sit-ins)을 조직하기로 하고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을 공개 모집한 것이다. 이들 프로그래머의 임무는 ‘압제’의 주범으로 지목받는 인물이나 기업, 기관의 웹사이트를 공격하는 것. “이제 혁명도 디지털화할 것이다”고 두 운동가는 선언했다.

“우리는 이것을 전자적 시민 불복종의 한 형태로 본다”고 레이는 뉴욕에서 열린 ‘반(反)콜럼버스의 날’ 행사의 참석자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지지자들을 동원해 남의 땅에 침입하거나 교통을 방해하는 식의 옛 사회운동 전술을 인터넷으로 옮겨가려고 한다”

이들의 새로운 개념은 종래의 급진적 운동가들이나 해커 양쪽에 새로운 출구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흔히 반권위주의적인 것으로 알려진 해커들의 경우, 비록 입으로는 ‘정보의 자유로운 공유(共有)’를 외쳤지만, 실제로는 군산(軍産) 복합체의 불완전한 컴퓨터 보안 장비를 타박하는 수준이었다. 공격 수준도 무의미한 데이터 파괴나 신용카드번호 도용 정도에 그쳤다.

한편 정치-사회 운동가들은 정보 인프라나 컴퓨터 네트워크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것에 무지하기도 했다. 이들은 더 많은 지지자와 동맹단체를 끌어모으는 것이 사회 변혁의 필수조건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방식에서는 종래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인터넷의 급속한 대중화가 상황을 급변시켰다. 한때 해커들의 놀이터처럼 인식되던 인터넷은 정치-사회 운동의 새로운 장(場)이 됐고, 해커들이 고안한 갖가지 해킹 도구와 방식은 운동가들의 유력한 무기가 됐다. 해킹 도구와 방식은 인터넷의 여러 사이트를 통해 공개돼 있으므로, 운동가들이 이를 배워 현장에 적용하기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인터넷을 무대로 한 운동그룹도 더없이 다양해졌다. 해적방송을 옹호하는 ‘라디오포올’(Radio4All)이 등장했는가 하면 전투적 동물 애호가 그룹을 자처하는 ‘동물해방전선’(ALF)까지 등장했다. ‘밀웜’(Milworm) 같은 익명을 쓰는 10대 해커 그룹도 다수 출현했다.

“핵티비즘은 수백만명을 향해 발언하는 한 방식이다”라고 ‘엑스플로이트’(X-ploit)로 알려진 멕시코의 한 해커 그룹은 주장한다. “우리는 우리와 많은 사람들이 이 반역적이고 부패한 정부에 반대한다는 사실을 외치고 싶다. 우리가 오프라인(현실)뿐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그렇게 한다면 변혁의 가능성도 그만큼 더 커질 것으로 믿는다”

최근 ‘www.hacktivism.org’라는 웹 주소를 선점한 해커그룹 ‘cDc’는 핵티비즘의 위력을 더 높이 평가한다. cDc의 회원이라고 밝힌 옥스블러드 러피안은 캐나다 토론토에 사는 해커. 그는 “만약 당신이 10명의 동조자들을 데리고 거리에서 시위를 벌인다면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할 확률이 높다. 그러나 온라인에서 10명의 지지자를 갖는다면 한 기업이나 기관의 네트워크를 무력화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을 포함한 cDc 그룹이 중국과 무역을 하는 미국 기업들의 웹사이트를 공격하려 계획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들 ‘핵티비스트’들의 움직임은 아직 미미하다. 실제 정보전(戰)보다 일회성 화제의 성격이 짙기도 하다. 그러나 미 정부기관들은 바짝 긴장하는 분위기다. 올해 초 재닛 리노 법무장관에 의해 설립된 미 국립정보보호센터의 마이클 버티스 소장은 “핵티비스트를 자처하는 이들의 공격을 ‘사이버-테러리즘’으로 규정하기는 아직 무리지만 그에 못지 않은 잠재적 위험성이 농후하다”고 말한다.

‘가상 연좌데모장’을 만든 레이와 도밍게즈는 미 실정법을 위반하지 않는 범위의 ‘가상 시위’를 고안했다. 그 중 하나가 ‘플러드넷’(FloodNet)이라는 프로그램이다. 이것을 특정 사이트에서 실행하면 그 사이트의 동일한 페이지를 분당 10회씩 자동으로 호출해 ‘교통 체증’을 유발한다. 그리고 다른 일반 접속자들에게는 해당 페이지 대신 오류 메시지를 보낸다.

플러드넷의 개발자인 카민 캐러식은 플러드넷에 대해 “사이버-테러리즘과는 전혀 다르다. 이것은 도리어 예술에 더 가깝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플러드넷을 멕시코의 독립기념일 사이트에 풀어놓을 것이라고 밝혔다.

미 국방부는 즉각 플러드넷이 호출하는 웹 주소를 실재하지 않는 주소로 변환시키고, 이들의 가상 시위를 비난했다. “플러드넷이 불법적인 것은 아닐지 몰라도 비윤리적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런 방식 대신 다른 건전한 가상 시위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핵티비즘을 어떻게 봐야 할까? 해커들의 활동을 추적하는 ‘앤티온라인’의 존 브라네세비치 편집장은 “인터넷에서 성장한 첫 세대의 출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터넷 대중화 초기의 10대 해커들이 바야흐로 왕성한 정치적 활력을 지닌 20대 중반 세대로 변모하고 있다. 핵티비즘은 그들의 새로운 출구인 것 같다” <김 상 현 기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