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 기사

“삐딱하게 보면 제대로 보여요” - 인터넷에 풍자 바람 일으킨 ‘딴지일보’ 김어준씨

NEWS+ 1998년 11월5일치
“처음부터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죠. 전혀 예상도 못한 일이에요. 한두달만 해볼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이제는 너무 많이 와버렸네요. 하하하!”
그는 자주, 그리고 밝게 웃는다. 김어준씨(30). 요즘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딴지일보’(http://ddanji.netsgo.comhttp://www.ddanzi.com) 의 발행인 겸 ‘딴지그룹 총수’다.

‘한국농담(한국논단)을 능가하며 B급 오락영화 수준을 지향하는 초절정 하이코메디 씨니컬 패러디 황색 싸이비 싸이버 루머 저널이며, 인류의 원초적 본능인 먹고 싸는 문제에 대한 철학적 고찰과 우끼고 자빠진 각종 사회 비리에 처절한 똥침을 날리는 것을 임무로 삼는다’며 지난 7월6일 웹에 처음 등장한 딴지일보는, 불과 3개월여만에 190만명 이상의 방문객(접속자)을 받으며, 인터넷에 때아닌 ‘풍자’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줄잡아 10여개의 각종 풍자 사이트가 등장했고, ‘패러디 사이트가 없는 웹사이트=인기없는 사이트’라는 이상한 등식까지 만들었다.

그뿐 아니다. 웹의 내용을 그대로 담은 종이책 ‘딴지일보’(자작나무 펴냄)는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오르내리며 사이버 스페이스에서와 마찬가지의 인기를 과시하고 있다.

그러한 ‘바람’을 낳은 총수의 집무실은, 그러나 초라하기 짝이 없다. 자기가 사는 아파트의 문간방이 바로 집무실이다. 그 안에 놓인 것도 데스크톱 컴퓨터 두대와 스캐너, 소파, 책 몇백권이 고작이다. 그나마 컴퓨터 한대는 주로 게임을 위한 오락용이며, 유일한 집무용 컴퓨터 또한 펜티엄 166MHz, 메모리 64MB, 하드디스크 3.5GB의 평범한 사양이다.

“딴지일보 만드는 게, 알고 보면 막노동이나 다름없어요. 글이고 그래픽이고 혼자 하니까… 잠도 하루에 두세시간밖에 못자고, 그래서 마감하면 한 사흘 동안 죽은 것처럼 잠만 자죠. 그래도 재미있고, 좋으니까… 하하하!”

그의 웃음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자신의 믿음대로 됐다는 통쾌함 때문이다. “저는 딴지일보를 통해 인터넷이 ‘디지털 아테네’ 시대를 열었다는 제 믿음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어요. 디지털 아테네 시대는 한사람 한사람이 곧 독립적인 매체가 되어 발언할 수 있는 그런 시대죠. 저를 보세요. 만약 인터넷이 없었다면 제가 이렇게 방안에 앉아서 몇백만명을 상대로 발언할 수 있었겠어요?”

그의 믿음은 인터넷이 막 대중화 바람을 타기 시작하던 96년부터 마음 속에 단단히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막 시작한 사업 때문에 짬을 낼 수가 없었다. 번듯한 직장(포스코) 때려치우고 나와 단돈 500만원으로 시작한 사업이었다. 회사이름은 플라넷(PlaNet). 대기업의 해외연수 프로그램에 인터넷을 접목한 신종 사업이었다. 연수자가 정해진 곳에 도착할 때마다 그곳에서 해야 할 일과 결과를 인터넷으로 주고받는 아이디어였다. “그런대로 할만 했는데, IMF가 닥치니까 직원들 월급도 못주겠더라구요. IMF가 곧 끝날 것 같지도 않고… 그래서 문 닫고 집안에 들어앉았죠”

그렇다고 틀에 얽매인 직장생활을 다시 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동안 생각만 해왔던 ‘디지털 아테네’를 한번 세워보기로 했다.

딴지일보를 띄운 첫 날. 방문자는 딱 두명. 그는 ‘야후!코리아’의 정보검색팀장에게 전자우편을 보냈다. ‘귀하를 딴지일보의 제1호 홍보팀장으로 임명함’이라는 장난스런 내용. 그런데 정보검색팀장은 뜻밖에도 의연하게(?) 대처했다. 딴지일보가 야후!코리아의 엔터테인먼트 분야 ‘쿨사이트’로 선정된 것. 이후 이용자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김씨는 딴지일보를 만들 때마다 두가지 원칙을 잊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나는 철저히 ‘비주류’를 지향한다는 것. 아예 첫 페이지에 ‘본지의 유일한 경쟁지는 썬데이 서울’이라고 못을 박았다. “특정 사실과 관계없는 사진, 그것도 눈 부위를 까만 띠로 가린 사진이 트레이드마크였던 선데이서울은 당시 하위 문화, 혹은 대중 문화의 대변지였죠. 비록 책상 밑에서 몰래 보던 잡지였지만 우리 문화를 좀더 풍성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딴지일보가 그런 기여를 했으면 해요. 우리 문화를 좀더 다양하게, 풍성하게 만드는 일이죠”

두번째 원칙은 ‘아쉬운 소리 하지 않는다’는 것. 딴지일보에는 ‘죄송합니다’라든가 ‘독자(또는 시청자) 여러분의 넓은 이해를 바랍니다’ 같은 말이 없다.

‘우짜겠습니까… 니가 참아야지’가 딴지일보의 논법이다. ‘답답하면 네가 해라’다. “TV나 신문에서는 독자와 매체가 분명히 구분됩니다. 독자가 돈을 내고 보니까, 당연히 매체에 요구할 수 있고, 또 매체는 죄송하다고 반응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딴지일보는 다릅니다. 개인이 곧 매체니까요. 불만 있다면 네 매체를 만들어서 네 목소리를 내라는 거죠”

하지만 그의 경제적 사정은 더없이 ‘아쉬운’ 상황이다. 벌써 5개월째 버는 것 없이 쓰고만 있다. ISDN으로 접속하는 인터넷 사용료만 월 20만원이 넘는다.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참아주는 아내가 고맙죠”라며 쑥스럽다는 표정.

“혼자 딴지일보 만드는 일은 이제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아요. 전자우편 읽는 데만도 매일 서너시간씩 걸리니…” 그는 딴지일보를 통해 새로운 사업 가능성을 찾고 있다. “조만간 광고를 유치할 계획인데, 기왕이면 대기업들의 메이저 광고를 실었으면 해요. 딴지일보가 하나의 당당한 매체라는 사실을 그런 점에서도 인정받고 싶거든요. 하하하!” <김 상 현 기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