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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기사

“인터넷 주권찾자”아시아기업들 뭉쳤다

한­일 등 10여업체 인터넷협회 본격 가동 | 美중심 운영에 맞불 | 1997년 7월10일 

    종주국(宗主國)은 힘이 세다. 온갖 태권도 대회를 싹쓸이하는 한국은 태권도의 종주국이다.

    인터넷의 종주국은 미국이다. 좀더 범위를 넓힌다면 영어를 상용하는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들이 다. 정보사회의 전령처럼 칭송받아온 인터넷이지만 거기에는 비영어권 국가들이 삼투하기 힘든 문화적 뿌리가 엄연히 도사리고 있다.

    인터넷 사용 인구나 그것을 이용한 비즈니스, 인터넷에 대 한 여러 규칙이나 표준들은 지금까지 종주국 중심으로 진행돼 왔다. 불공정한 게임이었다.

    앞으로는 그것이 바뀔 것 같다. 종주국의 텃세에 시달려 온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개발도상국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지난 6월24~27일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열린 세계 최대의 인터넷 회의 「아이네트 97」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꼽을 만했다.

    인터넷 비즈니스에 종사해 온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주요 기업들은 이 기간 중에 「아시아-태평 양 인터넷 협회」 총회를 열고 초대회장을 뽑는 한편, 주요 계획을 발표했다.

    초대회장에는 협회 출범을 주도적으로 이끈 한국의 허진호사장(아이네트)이 선출됐다(「아이네트 97」의 아이네트와 한국의 인터넷 기업 아이네트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아-태인터넷협회(APIA·Asia-Pacific Internet Association)의 목적은, 간단히 말하면 아-태 지역 에 있는 인터넷 기업들의 이익을 증진하고 관련 비즈니스를 활성화하는데 있다. APIA가 생기기 전까지 아시아에는 인터넷 업계나 소비자의 요구를 들어줄 이렇다 할 조직이 없었다.

    이 지역의 인터넷 성장세가 폭발적일수록 그러한 조직체의 빈 자리는 더욱 컸다. 특히 음란물, 반정부적 정 보 등에 대한 통제를 빌미로 인터넷에 갖가지 규제를 가하는 각국 정부들에 속수무책이었다.

    인터넷 종주국인 미국은 이미 CIX(인터넷 통상협의체·Commercial Internet eXchange)를 만들어 회원 기업들의 이해를 미 정부 정책에 적극 반영시켜 왔지만, 그러한 기관이 더욱 필요한 아시아 의 개발도상국들은 정작 자신의 손과 입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APIA는 각국 정부에 대한 적극적 로비활동을 주요전략 중 하나로 삼고 있다. 국가간 교환을 위한 상호접속과 미국 유럽연합 등과의 협조를 비롯해서 인터넷 보안과 인증(認證, CA), 전자 상거래, 도메인 이름 등에 관한 산업 표준을 정하는 일도 그에 못지 않은 역점 사업이다.

    아-태 지역의 인터넷 규모는 지난 2년새 크게 늘었다. 「폭발적」이라는 형용사 말고는 다른 표현 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국제전기통신연합(ITU)에 따르면 지난 2년간 이 지역의 인구 1000명당 인터넷 호스트컴퓨터의 규모는 평균 200% 이상 증가했다. 말레이시아는 무려 601%로 단연 선두 였고, 한국 일본 홍콩 등도 각각 226% 273% 278%의 성장세를 보였다.

    이러한 증가세에도 불구하고 아-태 지역의 「정보화 그늘」은 아직 짙다. UN개발계획(UNDP)의 한 자료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미국은 인터넷 서버 한대당 50명꼴로 인터넷 환경이 잘 발달해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60명, 일본 470명 등으로 다른 선진국도 대체로 양호하다.

    한국은 1550명. 개발도상국 치고는 괜찮은 편에 든다. 그러나 중국은 56만1000명, 인도는 무려 120만명이다. 아프가니스탄이나 베트남은 아예 인터넷 시설조차 없다.

    인터넷소사이어티의 래리 랜드웨버는 아이네트97총회 연설에서 『인터넷 인구를 보통 4000만명 안팎으로 잡지만 그 중 2400 만명 정도가 미국과 캐나다에 집중되어 있다. 이를 하루빨리 개선하지 않으면 「정보의 빈부 격 차」가 심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UNDP가 회의 기간에 내놓은 「아-태 정보 개발프로그램」(Asia-Pacific Development Information Programme)은 그러한 우려에 대한 최초의 종합 처방으로 보인다.

    UNDP는 지난 92년 지구정상 회담 직후부터 「지속가능한 개발 네트워킹 프로그램」(SDNP)을 만들어 성공적으로 운영해 왔다. SDNP는 30개 이상의 개발도상국에서 정부와 비정부 기관, 대학 기업 개인 등을 네트워크로 연결 해 지속가능한 개발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는데 활용했다.

    『인터넷과 정보고속도로에 대한 동남아 국가들의 이해를 높이는게 정보프로그램의 첫번째 과제』 라고 UNDP 대표들은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종자돈을 지원해 정보 후진국들의 인프라(전용망, 전 화망 등) 구축을 돕는 일, 인터넷 인력을 양성하는 일, 아-태 국가들을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일 등도 이 프로그램에 포함된다. 그에 필요한 기금은 앞으로 2~3년간 약 350만달러가 될 것으로 보 인다.

    매년 개최국을 바꿔가며 열리는 아이네트 97은 올해 처음으로 개발도상국인 말레이시아에서 열렸 다. 그만큼 정보사회의 「빛」보다는 「그늘」에 더 초점이 모였다.

    아이네트 97이 그 그늘을 얼마나 걷어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정보화」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충분히 환기된 것으로 보 인다. 〈콸라룸푸르=김 상 현 기자〉